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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소녀의 이름은 세라가 아니다 <나는 생각보다 맛있다>와 <스쿨 미즈>에서 개성 있는 이야기를 보여줬던 차상훈 작가의 신작 <보석안을 가진 소녀>도거침없는 이야기 진행과 여운을 남기는 엔딩, 한 번쯤 창작에 등장하는 소재를 어떻게 낯설게(개성있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등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도입부에서는 창작자를 집어삼킨(?) 창작물에 대한 여러 사례들이 스쳐지나갔는데, 우선 떠올랐던 건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였고, '작가의 말'에서도 등장한 <셜록 홈즈>였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 트루먼의 삶 전체를 기획하고 통제했던 감독(창작자)의 의지를 배반하고 트루먼은 관객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문 너머로 사라진다.감독이 트루먼의 세계관 이탈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것에 비해, 트루먼 쇼가 끝나고 나서 시청자들은 망설이지 않고 다른 채널의 다른 콘텐츠를 소비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셜록 홈즈>의 사례와는 거의 반대로 느껴지는데, <셜록 홈즈>는 오히려 창작자가 포기하려고 했던 창작물을 팬들의 광기 어린 팬심(?)으로 되살리기에 이른다. <트루먼 쇼>가 창작자와 창작물의 내적(이라는 표현이 걸맞는지는 모르겠다) 갈등이라면, <셜록 홈즈>는 현실 세계의 창작자와 세상의 대립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이 사례들을 떠올리면서 <보석안을 가진 소녀>를 감상한다면 좀 더 풍성한 감상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의 갈등보다는 창작자가 외부에서 겪는 갈등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선하다고 느꼈다. 이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 녹여낸다는 게 창작자 입장에서는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는데, 거침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내공을 느꼈다. 거침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창작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감히 생각해본다.  창작자는 자신이 창작한 작품들을 매 순간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를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뛰어넘는다는 게 더 나은 작품을 짓는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존의 것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짓는다는 뜻도 있다. 새롭다는 게 참 말은 쉬운데 사실 어렵다. 창작이라는 게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되겠지만, 기존의 것을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 하는 게 될 수도 있겠고, 새로운 표현으로 낯설게 만드는 것이될 수도 있겠다.  창작자가 이전의 창작물(이 작품의 흐름에 따르면 '잘 나가는 작품')에 얽메이는 순간 창작의 원동력을 잃기 쉽다.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 내 창작물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창작자에게도 큰 자부심이기도 하고, 그것이 '돈'과 얽혀 있다면 창작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얽메이기 시작하는 순간 더이상 창작이 아니라 공장이 되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창작자로서의 생명력은 거기서 판가름 날 수도 있다. 안전한 것에 머물러 자가복제 하느냐,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는 도전을 할 것이냐. 보통 이런 류의 작품들은 그런 창작자의 내적 동기를 다룬다면, <보석안을 가진 소녀>에서는 외적 동기를 다루는 듯하다.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미 새로운 작품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암시(?)를 끊임없이 받고 있다. '홍세라'를 죽이기로 결심했으니까. 주인공은 '홍세라'가 아닌 '소녀'를 선택했지만외부의 압력에 의해 나아가기 쉽지 않아 보인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압력이 지극히 현실적이라 몰입해서 읽었다) 그 쉽지 않은 외부의 상황과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뒤섞인 상태를'소녀'의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표현되는 것도 좋았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면 어느새 나는 한 명의 창작자로서 주인공의 결심을 응원하게 된다. 여운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작품이다.차상훈 작가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떤 힘을 보여줄 지 기대된다.  박은비
홍세라 죽이기 창작자의 고통을 다룬 작품은 그간 많았다. 대표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스티븐 킹의 <미저리> 역시 소설 창작의 고통을 전면으로 다루며 공포와 서스펜스로 구현했다.  차상훈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와 주제의 결이 같지만 사뭇 다르다. 바로 쓰고 싶은 '다른 이야기'가 구체성을 띠고 등장한다는 점이다. 보석안을 가진 소녀. 그녀가 그 주인공이다.  그간 비슷한 작품들이 창작자의 고통 그 자체에 천착했다면 이 소설은 작가의 창작의 고통을 다루면서도 또 다른 욕망을 선명히 내비친다. 그 욕망은 '다른' 작품을 쓰고 싶다는 것인데, 과연 작품 속 작가가 그 역시 머잖아 '홍세라'라는 캐릭터에게서 발견한 것과 비슷한 고통을 안겨줄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작가의 '홍세라 죽이기'는 끝내 성공한 듯 실패인 듯, 아리송하게 끝난다. 조금 더 극적으로 결말을 맺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작가로서 한 적은 없지만, 어떤 기분과 느낌, 고통일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기에 쉬이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가의 새로운 캐릭터, '보석안을 가진 소녀'이 여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을 그만 쓰고 싶다'에서 나아가 '그 소설을 쓰고 싶다'까지 닿은 것 같아 한 단계 진일보한 서사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점은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다소 파편적으로 이어지고 과하게 느껴지며 인물의 대사가 지나치게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인데, 그건 어쩌면 이 작가의 매력이고 나와 다른 글쓰기 스타일일지도 모른다는 데서,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 일단 재밌고 시의성이 충분하다는 점에서 별다른 단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차상훈 작가의 매력은 끝없이 샘솟는 새로운 소재와 설정, 이야기에 있다고 본다. 비록 많은 이야기를 읽은 건 아니지만,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상헌
그 문을 열 수 있다면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작가의 소설집 <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에서였고, 그 다음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읽었다.  처음엔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증이 만발했다. 혹여나 제목에서 풍기는 첫 인상처럼 낯설면서도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이진 않을까 내심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 소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작가도 앞서 언급한 소설집 인터뷰에서 언급한 테마)를 아슬아슬하게 거닐면서 동시대적 불안과 정체성의 고민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방독면을 쓴 바나나, 는 올렉산드르 그림의 표식이다. 나는 다 읽고 나서도 아직까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처음엔 분석하려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가 문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며 떠드는 이야기처럼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분명 언젠가 해석할 필요없이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하며.  후반부, 왜 문을 그림의 소재로 삼느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올렉산드르는 '출구'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도 맞겠지만, 올렉산드르에게 문은 출구인 동시에 어느 갇힌 곳-방(편견, 아집 등)으로 내몰리는 통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래서 그는 문을 그린 것이다. 수도 없는 문을 곳곳에 그리고 그를 통해 마법처럼 넘나들면서 자기자신을 횡단한 것이다.  나도 그 문을 가지고 있겠지. 아직 색도, 형태도 잘 모르지만 말이다. 이상헌
살아지고, 또 사라지는 살아지고, 또 사라지는 그날 이후로, 세상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나’였다.  그것은 불시에 닥치는 지진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또 시시때때로 나를 덮쳐온다. 집 밖으로 나서기가 두렵다. 아니, 방 안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다는 감각. 그것은 내가 숨쉬고 생동하는 것이 아닌, 어항 속 베타피쉬를 통해 감각될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삶’의 감각이 죽었다. 어항 속에 배를 뒤집고 둥둥 떠다니는 베타피쉬. 그것이 죽자 내 삶의 감각마저 따라 죽었다. 다 사라지더라. 살아지는 것인지, 사라지는 것인지. (-본문 중) 고시원 벽에 남겨진 누군가의 흔적을 본다. 그 역시 이 곳에서 ‘나’가 느끼는 두려움의 진앙지에 서 있었던 걸까.  과거의 지진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후로 나는 줄곧 혼자였다. 그러나 어찌어찌 살아졌다. 하루하루 언제 또다시 지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서. 제법 오래 잘 버텨왔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트라우마의 진앙지에 서 있던 지원을 만났다.  그러다 또다시 삶이 지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자리에 서 있던 우리는 어느새 멀리 흩어졌다. 저 멀리 지원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나와는 다른 자리에 서 있다. 여진처럼 남아 있던 지진이 또 한번 삶을 뒤흔든다. 내 눈 앞에 보이던 것들을 순식간에 앗아간다.  푸름이, 지원이, 그리고...  <너를 넘어>는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머리로는 잊어버리고 싶지만, 그것은 끝내 잊히지 않는다. 되레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의 위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 왜냐하면, 목각에 깊이 각인된 이름처럼, 그 기억은 ‘나’의 몸에 선명한 감각처럼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에 사는 사람처럼, '나'의 삶 또한 그러하다. 너를 넘어... 흔들림과 버팀 사이, ‘나’의 하루는 그렇게 살아지고 또 사라진다.  이시경
삼동으로 돌아가지 않은 밤   나는 짬뽕을 읽으며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나도 삼동으로 돌아가지 않은 날이 있었으니까.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밤이 있다. 자주 있다면, 그건 별일 아닐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정착이라고 믿었던 곳을 떠나야 하는 순간을 만난다. 누구나 다. 운명을 가르는 시간.  젊음은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혹은 가슴 아프게 겪어내야 하는 시절이다. 누구는 그런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하지만, 그럴 때면. 그렇게 통달한 마음으로 견뎌내긴 쉽지 않다.   이 작품 덕분에 삼동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녀와 내가 만났다. 그리고 새로 도착한 곳에서 짬뽕을 시킨다. 먹어야 사니까.   뻔한 얘기 같지만, 우리는 또 새로운 운명을 개척한다.   나는 삼동으로 돌아가지 않은 밤에, 어린이 병원 앞 오래된 그네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세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어느 먼지 창고에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짬뽕보다 더할 것도 덜 할 것도 없는 그런 맛이 나는 먼지 창고였다. 그날을 잊지 못해 이 작품을 다 읽은 후에 먼지 맛이 그리웠다. 청춘이었으니까.   작품의 플롯은 인물을 나열해가면서 서사를 배열한다. 독특한 구조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긴 인생의 중요한 서사들을 압축하고 수렴한 작가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짬뽕을 읽고 먼지 같던 지난 날을 더듬었으니, 읽기에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 이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먹어 보지 않고 맛을 알 수 없듯이, 얼큰한 짬뽕 맛을 직접 보시길 바란다. 당신의 삼동을 만나기도 할테니까.혜섬
기억이 찾아올 때 기억이 찾아올 때기억이 찾아온 건, 우연이었다. 불쑥, 예기치 못하게. 그것은 외삼촌이 제의한 알바를 통해서였다. 그렇게 ‘나’는 공주에 사는 공할머니를 일주일 간 보살피기 위해 공주행 버스에 몸을 싣는다. 그 대가는 공짜 백두산 여행.  <왕릉에서 보낸 일주일>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설 초반에, 외삼촌의 입을 통해 공할머니가 처음 언급되었을 때 언뜻 거리감이 느껴졌다. 친외할머니라기보다는 ‘나’와는 크게 상관없는 ‘어떤 할머니’인가? 라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느낌은 선명하다기보다 그냥 지나치게 되는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이후 소설을 다 읽고 난 이후에야, 그것이 마치 흙 속에 전모를 숨긴 채 지표면 위에 아주 작은 단서를 드러낸 지층 속 유물과도 같았구나,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사가 진행되면서, 이야기는 독자를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한 채 그냥 지나쳐 버렸던 낯선 느낌의 진원지로 데려간다. 처음 ‘나’의 관심은 공할머니보다는 백두산 여행에 꽂혀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예기치 못한 기억의 시공간을 여행하게 된다.  세상과 단절된 공할머니의 집에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기억의 전모. 그것은 공할머니의 의도도, 나의 의도도 아니었다. 기억 스스로가 ‘나’를 찾아온 듯. 기억의 지층 속에 자리 잡은 망각된 아픔과 슬픔이 기억의 지표면 위로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그날의 일을 공할머니도 기억하고 있을까.  어쩌면 공할머니의 기억이 온전치 않다는 사실이 다행일지도 모른다. 만일, 기억이 온전하다면 공할머니도, 나도 서로를 다르게 대했을지 모른다. 이해의 지점에 이르는 것은, 늘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오랜 아픔과 슬픔은 언어로 헤집어 놓을수록 그 빛깔만 보다 퇴색할 뿐이니.  한 사람의 생과 기억을, ‘왕릉’이라는 소재에 빗대어 기억의 주제로 엮어간 점이 낯설고 재미있었다. <왕릉에서 보낸 일주일>이라는 제목을 보고 처음 떠오른 건 인디애나 존스 같은 으스스한 무덤 속 이야기였는데- 그 상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소설은 그보다 훨씬 고요한 곳으로 독자를 데려간다. 차분하게, 그러나 깊이 삶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  문득, 떠오른 기억이다. 내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외할머니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외할머니댁에만 가면 시간이 정지된 듯한, 소파에 앉은 외할머니가 마치 눈만 끔벅이는 정물처럼 여겨진 적이 있었다. 소설을 읽으며 그때의 느낌이 되살아오는 듯했다.  내게도 기억이 찾아오는 순간이다.  이시경
모스키에 오코로 향하는 인생 모스키에 오코로 향하는 인생 그녀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내려놓았다. 그와의 미래를 꿈꾸며, 자신이 쌓아온 현실을 뒤로한 채 새로운 미래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그녀는 알지 못했다.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을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혼반지가 손가락에 조금 맞지 않아도, 딱히 머물 집이 정해지지 않아도, 차가 없어도, 돈이 풍족하지 않아도, 그의 이름은 그녀에게 행복한 미래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나 미소 짓던 현실의 뚜껑이 하나하나 열리는 순간, 또 다른 현실의 얼굴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 웃는 듯 웃지 않는 듯, 알 수 없는 그 표정. 그건 그녀가 사랑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적응하기도 전에 또 다른 현실의 뚜껑이 열린다. 또 다른 현실의 민낯. 그녀가 꿈꿔온 타국 땅에서의 미래는 이제 그녀에게 또 하나의 현실이 되었다. 화려해 보이는 현실의 뚜껑이 하나씩 열릴 때마다 그것은 그녀에게 무언가를 포기하거나 내려놓기를 요구한다. 그 종착지는 어디일까.  마지막 뚜껑이 열릴 때 그녀는 어디로 향해야 할까.  <마지막 마트료시카>를 다 읽고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는 말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미래를 위해 포기한 현실이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이 섬뜩하게 다가왔다.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우린 무엇을 욕망하고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 걸까.  작품을 읽다 보면 어느샌가 ‘결코 포기하면 안 됐지만 결국 포기한 것들’이 외눈박이처럼 투명한 수면 위로 떠오르는 모스키에 오코로 향하는 나를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마지막 뚜껑이 열리지 않길 바라며.  이시경
우리 모두의 검은 수첩에 대하여 「검은 수첩을 위하여」를 읽은 뒤 가장 강하게 남은 후감은‘기억은 과연 믿을 수 있는가’라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어떤 사건을 기록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기록이라는 행위 자체가 얼마나 불완전하고 불안정한가를 드러내는 서사로 느껴졌다. 검은 수첩은 처음에는 과거를 붙잡기 위한 도구처럼 보인다. 사라지는 기억을 붙들고, 흐릿해지는 감정을 보존하려는 시도처럼 읽힌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그 수첩은 오히려 기억을 왜곡하고 재구성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기록된 문장은 사실을 고정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특정한 시선과 선택이 개입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쓰고 무엇을 쓰지 않는가의 문제는 곧 ‘어떤 삶을 남길 것인가’라는 문제로 확장된다. 이 지점에서 나는 기록의 양면성을 강하게 느꼈다. 우리는 흔히 기록을 진실에 가깝다고 믿지만, 이 작품은 그 믿음을 흔든다. 수첩 속의 문장은 실제를 반영하기보다, 오히려 화자의 해석과 욕망이 덧씌워진 또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 결국 기록은 기억을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또한 인상 깊었던 점은 감정의 처리 방식이다. 작품은 격렬한 사건이나 극적인 전개에 의존하지 않는다. 대신 조용하고 절제된 문장들 속에서, 서서히 어긋나고 균열이 생기는 내면을 보여준다. 이 절제된 서술은 오히려 더 큰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독자는 분명한 진실에 도달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의심하고 해석해야 하는 위치에 놓인다. 읽고 난 뒤 남는 것은 명확한 결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불안이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들, 내가 기록해온 것들이 과연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 하는 의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모두 각자의 ‘검은 수첩’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른다. 결국 이 작품은 기억과 기록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확장된다. 우리가 믿고 있는 자기 자신조차, 수많은 선택적 기록과 해석 위에 세워진 것이라면, 그 기반은 얼마나 단단한 것일까. 「검은 수첩을 위하여」는 그 불안정한 기반을 조용하지만 집요하게 드러내는 작품이었다.​   시사랑
날것의 감각, 날것의 희망  한쪽에서는 ‘아파야 청춘’이라고 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안 아파야 청춘’이라고 한다. ‘안’이라는 글자 하나로 정반대의 의미가 된다. 얼핏 둘 다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론 꼭 그렇다고만은 할 수 없는 것 같다.  정작 아픈 당사자는 말이 없다.  아픈 당사자가 입을 다물고 있는데, 우리 시대에 희망을 논한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생각보다 맛있다>를 읽고, 어설픈 희망으로 현실을 미화하지 않고 온몸에 문신처럼 퍼져나가는 상처를 통해 삶의 꽃을 피워나가는 당당한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현장을 살고,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상처 입는다. 그리고 스스로 핥거나 상대를 핥아 주며 삶을 위무한다. 허접한 설교조나 말장난이 아니라 ‘날것의 삶’으로부터 피어나는 ‘날것의 감각’을 접하게 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가 이것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핥아 줘.” 이 말을 일상에서 상대방에게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묘한 성적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그것을 미끼로 독자를 시종일관 이야기 속에 붙잡아 두는 작가의 과감한 전략이 인상적이었다.  이 소설은 쉽게 읽힌다. 문장도 단순하다. 그러다 중반쯤 들어서면 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밍밍한 플레인요거트를 먹다 중간에 숨겨진, 그것도 인공감미료가 첨가되지 않은 블루베리잼이 불쑥 튀어나오는 것처럼. 조금씩, 조금씩 그것을 남기지 않으려 핥게 된다. 밍밍함과 달달함, 그 묘한 조화 속에는 살짝 눈물이 날 것 같은 위로와 연대가 한 스푼 섞여 있다.  오늘 하루를 견딘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이처럼 사소한 ‘날 것의 감각과 서로 간의 소통’에 의지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다 읽고 나면, 내 몸에 난 상처를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었다. 왠지 희망이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이다. 이시경
로보, 어서 나를 물어줘! 로보, 어서 나를 물어줘!   김성호 작가의 신작 <로보, 나를 물어줘>는, “개와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를 매개로 개인의 트라우마와 가족사의 비밀을 입체적으로 드러낸 서사적 실험” (-에디터픽 포인트) 이다.  2025년 3월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이후 일 년여 만에 여덟 편의 단편을 발표한 작가의 행보는 매번 새롭고 낯선 방향으로 독자를 이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개를 통한 시간여행이라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은 대개 그것을 가능하게 할 물리적 장치 설정에 기댄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르다. 별도의 SF적 설정 없이, 오직 문장의 힘만으로 시간여행의 개연성을 만들어낸다. 작품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분절된 과거 기억의 시간 속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 감각이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점이 신선하게 와 닿았다.  기억이라는 덩어리를 쪼개고 분해하면, 해결되지 않는 지점은 늘 어떤 트라우마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상처의 빛깔도 어느새 달라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누구든 그 상처를 처음 마주한 순간으로 되돌아가 무언가를 되돌리려 하거나 혹은 진실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묻는다.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전부일까. 만일 그 순간을 되돌린 이후에 새롭게 치러야 할 또 다른 트라우마가 있다면.  정체절명의 순간, 주인공은 다시 외친다. 로보, 나를 물어줘! 트라우마가 마치 삶의 속성이라도 되듯, 운명의 굴레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로보, 나를 물어줘>는 그 굴레를, 낯설게 비튼 시간 속에서 끝까지 정면으로 응시한다. 재독 삼독하면 또 새로운 의미가 보이는 좋은 작품이었다. 이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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