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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이별로 건너가는 순간 나도 모르게 읽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도 잘 우는 법이 없는데, 주책맞게도 고작, 소설 한 편에 눈물이 났다. 이별이라는 소재는 자칫 신파로 흐를 여지가 많은데, 이 소설은 그렇지 않다. 독자에게 감정을 강요하는 대신, 감정 버튼이 저절로 눌리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십 년간 부부로 살았던 지훈과 서윤이 이혼하기 전, 마지막 하루를 다룬다. 한때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함께 장만하고 가꾼 가구들이 모조리 빠져나간 텅 빈 거실. 그곳에 남은 것은 ‘잔인할 정도로 길고 정직한’ 햇살과, 그 빛의 ‘역광을 받으며 정적 속에서 느리게 소용돌이치는’ 미세한 먼지뿐이다.  빈 것은 거실만이 아니다. 가구가 실려 나간 자리처럼, 두 사람 사이를 채우던 것들도 어느새 하나씩 빠져나가고 없다. 사랑이 멈춘 자리에 남은 것 역시 먼지처럼 날리는 텅 빈 온기뿐이다. 내일이 되면 서로 남남이 될 그들에게는 어떤 사랑이 남아 있을까. 그들은 지훈이 끓인 김치찌개로 마지막 식사를 한다. 결혼 내내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레서피, 이별의 순간에조차 그대로다. 다만 지훈은 말 대신 남은 두부로 마음을 건넨다. 두 사람은 안다. 그들 사이에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랑을, 그리고 그것이 완전히 식기 직전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를 약간의 온기를. 그러나 그들은 그 온기를 붙잡지 않는다. 대신 각자의 방식으로 삼킨다. 지훈은 지훈대로, 서윤은 서윤대로.  사랑이 이별로 건너가는 순간을 이토록 정확히 포착한 작품을 만나 한 독자로서 기뻤다. 한 때 사랑이라 불렀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법에 대해 오래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평생 사랑을 ‘시작하는’법과 ‘멈추는’법을 번갈아 배우는 중인지도 모른다.  각자 뒤돌아서는 그들이, 부디 너무 많이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시경
김치찌개를 끓여 먹고 싶은 밤 아, 김치찌개 먹고 싶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김치찌개에 딱히 원한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정말 별 것 아닌 소설인데, 이혼을 앞둔 부부가 김치찌개를 끓여 먹으며 지난날을 회상하는 것 뿐인데 왜 이리 눈앞에서 그들을 목도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고 가슴 저린지.  지훈과 서윤, 단 두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이사와 이혼을 앞둔 집에서 김치찌개를 끓이고, 먹고, 마무리하는 과정은 가히 인생의 희노애락과 닮아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심사평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핍진성이지만, 나는 그에 더해 이 작품에 내재되어있는 아포리즘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포리즘, 그러니까 잠언을 이야기하는 문학 작품은 흔히 실패하기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진리를 흉내내는 것만큼이나 쉽고 어설픈 일은 없으므로. 활용 관건은 그걸 얼마나 자연스럽게, 설득시키냐일 것이다. 이 작품은 그 지점을 바로 무리없이 해낸다. 인물의 대사를 통해 인생의 진리를 과하지 않게 언뜻언뜻 내비치는 순간이 종종 있는데 그게 자연히 설득된다. 무엇보다 앞서 말한 핍진성 덕분에 이미 독자가 이 작품 안에 몰입되어 있는 덕택일 거다.  문장과 묘사 또한 감탄했다. 같은 창작자인 나로선 아직 갖지 못한 경험과 시간이 응축되어 자연발생한 표현들이 곳곳에 흘러넘친다. 조금 과잉될 때도 있다고 느꼈지만 부족한 것보단 훨씬 낫고, 그 과잉 또한 자체로 좋아서 큰 흠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신인 작가의 등장을 환영하며,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든다.   이상헌
소녀의 이름은 세라가 아니다 <나는 생각보다 맛있다>와 <스쿨 미즈>에서 개성 있는 이야기를 보여줬던 차상훈 작가의 신작 <보석안을 가진 소녀>도거침없는 이야기 진행과 여운을 남기는 엔딩, 한 번쯤 창작에 등장하는 소재를 어떻게 낯설게(개성있게) 표현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 등 힘이 느껴지는 작품이라 흥미롭게 읽었다. 도입부에서는 창작자를 집어삼킨(?) 창작물에 대한 여러 사례들이 스쳐지나갔는데, 우선 떠올랐던 건 짐 캐리 주연의 <트루먼 쇼>였고, '작가의 말'에서도 등장한 <셜록 홈즈>였다. <트루먼 쇼>의 마지막 장면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주인공 트루먼의 삶 전체를 기획하고 통제했던 감독(창작자)의 의지를 배반하고 트루먼은 관객들에게 인사를 남기고 문 너머로 사라진다.감독이 트루먼의 세계관 이탈을 필사적으로 막았던 것에 비해, 트루먼 쇼가 끝나고 나서 시청자들은 망설이지 않고 다른 채널의 다른 콘텐츠를 소비한다. 이 마지막 장면은 <셜록 홈즈>의 사례와는 거의 반대로 느껴지는데, <셜록 홈즈>는 오히려 창작자가 포기하려고 했던 창작물을 팬들의 광기 어린 팬심(?)으로 되살리기에 이른다. <트루먼 쇼>가 창작자와 창작물의 내적(이라는 표현이 걸맞는지는 모르겠다) 갈등이라면, <셜록 홈즈>는 현실 세계의 창작자와 세상의 대립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이 사례들을 떠올리면서 <보석안을 가진 소녀>를 감상한다면 좀 더 풍성한 감상이 될 것 같다. 이 작품에서는 창작자와 창작물의 갈등보다는 창작자가 외부에서 겪는 갈등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선하다고 느꼈다. 이를 작품 속으로 끌고 들어와 녹여낸다는 게 창작자 입장에서는부담스러운 일일 수도 있는데, 거침없이 이야기가 진행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내공을 느꼈다. 거침없이 진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만큼 창작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감히 생각해본다.  창작자는 자신이 창작한 작품들을 매 순간 뛰어넘어야 하는 과제를 필연적으로 가지게 된다. 뛰어넘는다는 게 더 나은 작품을 짓는다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기존의 것을 반복하지 않고 새로운 것을짓는다는 뜻도 있다. 새롭다는 게 참 말은 쉬운데 사실 어렵다. 창작이라는 게 없던 것을 만들어내는 것도 되겠지만, 기존의 것을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 하는 게 될 수도 있겠고, 새로운 표현으로 낯설게 만드는 것이될 수도 있겠다.  창작자가 이전의 창작물(이 작품의 흐름에 따르면 '잘 나가는 작품')에 얽메이는 순간 창작의 원동력을 잃기 쉽다. 하지만 그러기 쉽지 않다. 내 창작물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다는 사실이창작자에게도 큰 자부심이기도 하고, 그것이 '돈'과 얽혀 있다면 창작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구속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얽메이기 시작하는 순간 더이상 창작이 아니라 공장이 되어버리는 느낌을 받는다.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창작자로서의 생명력은 거기서 판가름 날 수도 있다. 안전한 것에 머물러 자가복제 하느냐, 새로운 것을 향해 나아가는 도전을 할 것이냐. 보통 이런 류의 작품들은 그런 창작자의 내적 동기를 다룬다면, <보석안을 가진 소녀>에서는 외적 동기를 다루는 듯하다.작품에서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미 새로운 작품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암시(?)를 끊임없이 받고 있다. '홍세라'를 죽이기로 결심했으니까. 주인공은 '홍세라'가 아닌 '소녀'를 선택했지만외부의 압력에 의해 나아가기 쉽지 않아 보인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압력이 지극히 현실적이라 몰입해서 읽었다) 그 쉽지 않은 외부의 상황과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뒤섞인 상태를'소녀'의 이름을 짓지 못하고 있는 상태로 표현되는 것도 좋았다.  작품의 마지막에 가면 어느새 나는 한 명의 창작자로서 주인공의 결심을 응원하게 된다. 여운 속에서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되는 작품이다.차상훈 작가의 다음 작품은 또 어떤 힘을 보여줄 지 기대된다.  박은비
홍세라 죽이기 창작자의 고통을 다룬 작품은 그간 많았다. 대표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스티븐 킹의 <미저리> 역시 소설 창작의 고통을 전면으로 다루며 공포와 서스펜스로 구현했다.  차상훈 작가의 이번 작품은 그와 주제의 결이 같지만 사뭇 다르다. 바로 쓰고 싶은 '다른 이야기'가 구체성을 띠고 등장한다는 점이다. 보석안을 가진 소녀. 그녀가 그 주인공이다.  그간 비슷한 작품들이 창작자의 고통 그 자체에 천착했다면 이 소설은 작가의 창작의 고통을 다루면서도 또 다른 욕망을 선명히 내비친다. 그 욕망은 '다른' 작품을 쓰고 싶다는 것인데, 과연 작품 속 작가가 그 역시 머잖아 '홍세라'라는 캐릭터에게서 발견한 것과 비슷한 고통을 안겨줄 거라는 사실을 몰랐을까.  작가의 '홍세라 죽이기'는 끝내 성공한 듯 실패인 듯, 아리송하게 끝난다. 조금 더 극적으로 결말을 맺었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경험을 작가로서 한 적은 없지만, 어떤 기분과 느낌, 고통일지 충분히 짐작 가능하기에 쉬이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작가의 새로운 캐릭터, '보석안을 가진 소녀'이 여타 비슷한 주제를 다룬 작품들과 달리 '이 작품을 그만 쓰고 싶다'에서 나아가 '그 소설을 쓰고 싶다'까지 닿은 것 같아 한 단계 진일보한 서사라고 생각했다.  아쉬운 점은 장면과 에피소드들이 다소 파편적으로 이어지고 과하게 느껴지며 인물의 대사가 지나치게 소모적으로 느껴지는 경우도 있었다는 것인데, 그건 어쩌면 이 작가의 매력이고 나와 다른 글쓰기 스타일일지도 모른다는 데서, 무엇보다 그런 것들을 차치하고 일단 재밌고 시의성이 충분하다는 점에서 별다른 단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차상훈 작가의 매력은 끝없이 샘솟는 새로운 소재와 설정, 이야기에 있다고 본다. 비록 많은 이야기를 읽은 건 아니지만,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러한 이야기를 들려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상헌
그 문을 열 수 있다면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건 작가의 소설집 <춘천 사람은 파인애플을 좋아해>에서였고, 그 다음 이곳에서 다시 한 번 읽었다.  처음엔 무슨 이야기일까, 궁금증이 만발했다. 혹여나 제목에서 풍기는 첫 인상처럼 낯설면서도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이진 않을까 내심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 소설은 환상과 현실의 '경계'(작가도 앞서 언급한 소설집 인터뷰에서 언급한 테마)를 아슬아슬하게 거닐면서 동시대적 불안과 정체성의 고민을 정확하게 짚어낸다.  방독면을 쓴 바나나, 는 올렉산드르 그림의 표식이다. 나는 다 읽고 나서도 아직까지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 모른다. 처음엔 분석하려 했으나 이내 포기했다.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가 문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며 떠드는 이야기처럼 지금은 이해되지 않지만 분명 언젠가 해석할 필요없이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오리라 생각하며.  후반부, 왜 문을 그림의 소재로 삼느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올렉산드르는 '출구'의 뜻이라고 말한다. 그도 맞겠지만, 올렉산드르에게 문은 출구인 동시에 어느 갇힌 곳-방(편견, 아집 등)으로 내몰리는 통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그래서 그는 문을 그린 것이다. 수도 없는 문을 곳곳에 그리고 그를 통해 마법처럼 넘나들면서 자기자신을 횡단한 것이다.  나도 그 문을 가지고 있겠지. 아직 색도, 형태도 잘 모르지만 말이다. 이상헌
살아지고, 또 사라지는 살아지고, 또 사라지는 그날 이후로, 세상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후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바로 ‘나’였다.  그것은 불시에 닥치는 지진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또 시시때때로 나를 덮쳐온다. 집 밖으로 나서기가 두렵다. 아니, 방 안에 있어도 마찬가지다. 살아 있다는 감각. 그것은 내가 숨쉬고 생동하는 것이 아닌, 어항 속 베타피쉬를 통해 감각될 뿐이다. 그러나 어느 날 ‘삶’의 감각이 죽었다. 어항 속에 배를 뒤집고 둥둥 떠다니는 베타피쉬. 그것이 죽자 내 삶의 감각마저 따라 죽었다. 다 사라지더라. 살아지는 것인지, 사라지는 것인지. (-본문 중) 고시원 벽에 남겨진 누군가의 흔적을 본다. 그 역시 이 곳에서 ‘나’가 느끼는 두려움의 진앙지에 서 있었던 걸까.  과거의 지진은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이후로 나는 줄곧 혼자였다. 그러나 어찌어찌 살아졌다. 하루하루 언제 또다시 지진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안고서. 제법 오래 잘 버텨왔다. 그러다 나와 비슷한, 트라우마의 진앙지에 서 있던 지원을 만났다.  그러다 또다시 삶이 지진처럼 흔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자리에 서 있던 우리는 어느새 멀리 흩어졌다. 저 멀리 지원이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이제 나와는 다른 자리에 서 있다. 여진처럼 남아 있던 지진이 또 한번 삶을 뒤흔든다. 내 눈 앞에 보이던 것들을 순식간에 앗아간다.  푸름이, 지원이, 그리고...  <너를 넘어>는 트라우마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의 주인공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머리로는 잊어버리고 싶지만, 그것은 끝내 잊히지 않는다. 되레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의 위력은 점점 더 강해진다. 왜냐하면, 목각에 깊이 각인된 이름처럼, 그 기억은 ‘나’의 몸에 선명한 감각처럼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언제 지진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에 사는 사람처럼, '나'의 삶 또한 그러하다. 너를 넘어... 흔들림과 버팀 사이, ‘나’의 하루는 그렇게 살아지고 또 사라진다.  이시경
삼동으로 돌아가지 않은 밤   나는 짬뽕을 읽으며 나의 과거를 떠올렸다. 나도 삼동으로 돌아가지 않은 날이 있었으니까.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밤이 있다. 자주 있다면, 그건 별일 아닐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정착이라고 믿었던 곳을 떠나야 하는 순간을 만난다. 누구나 다. 운명을 가르는 시간.  젊음은 그런 것들을 과감하게 혹은 가슴 아프게 겪어내야 하는 시절이다. 누구는 그런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고. 하지만, 그럴 때면. 그렇게 통달한 마음으로 견뎌내긴 쉽지 않다.   이 작품 덕분에 삼동으로 돌아가지 않는 그녀와 내가 만났다. 그리고 새로 도착한 곳에서 짬뽕을 시킨다. 먹어야 사니까.   뻔한 얘기 같지만, 우리는 또 새로운 운명을 개척한다.   나는 삼동으로 돌아가지 않은 밤에, 어린이 병원 앞 오래된 그네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세었다. 그 다음 날, 아침, 나는 어느 먼지 창고에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짬뽕보다 더할 것도 덜 할 것도 없는 그런 맛이 나는 먼지 창고였다. 그날을 잊지 못해 이 작품을 다 읽은 후에 먼지 맛이 그리웠다. 청춘이었으니까.   작품의 플롯은 인물을 나열해가면서 서사를 배열한다. 독특한 구조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긴 인생의 중요한 서사들을 압축하고 수렴한 작가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짬뽕을 읽고 먼지 같던 지난 날을 더듬었으니, 읽기에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 이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먹어 보지 않고 맛을 알 수 없듯이, 얼큰한 짬뽕 맛을 직접 보시길 바란다. 당신의 삼동을 만나기도 할테니까.혜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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