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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로보, 어서 나를 물어줘! 로보, 어서 나를 물어줘!   김성호 작가의 신작 <로보, 나를 물어줘>는, “개와 시간여행이라는 장치를 매개로 개인의 트라우마와 가족사의 비밀을 입체적으로 드러낸 서사적 실험” (-에디터픽 포인트) 이다.  2025년 3월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이후 일 년여 만에 여덟 편의 단편을 발표한 작가의 행보는 매번 새롭고 낯선 방향으로 독자를 이끈다.  이번 작품을 통해 개를 통한 시간여행이라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시간여행을 소재로 한 소설은 대개 그것을 가능하게 할 물리적 장치 설정에 기댄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다르다. 별도의 SF적 설정 없이, 오직 문장의 힘만으로 시간여행의 개연성을 만들어낸다. 작품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분절된 과거 기억의 시간 속에 서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 그 감각이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점이 신선하게 와 닿았다.  기억이라는 덩어리를 쪼개고 분해하면, 해결되지 않는 지점은 늘 어떤 트라우마와 맞닿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 상처의 빛깔도 어느새 달라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시간여행이 가능하다면, 누구든 그 상처를 처음 마주한 순간으로 되돌아가 무언가를 되돌리려 하거나 혹은 진실을 확인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묻는다. 과연, 그렇게 하는 것이 전부일까. 만일 그 순간을 되돌린 이후에 새롭게 치러야 할 또 다른 트라우마가 있다면.  정체절명의 순간, 주인공은 다시 외친다. 로보, 나를 물어줘! 트라우마가 마치 삶의 속성이라도 되듯, 운명의 굴레는 쉽게 풀리지 않는다. <로보, 나를 물어줘>는 그 굴레를, 낯설게 비튼 시간 속에서 끝까지 정면으로 응시한다. 재독 삼독하면 또 새로운 의미가 보이는 좋은 작품이었다. 이시경
크툴루 프타곤, 크툴루 프타곤  크툴루 프타근, 크툴루 프타근… 여기, 한 여자의 사랑을 얻기 위해 스스로 ‘계몽’된 ‘한남’을 자처한 한 남자가 있다. 그로 인해 그는 그 여자, 수아와 함께 동거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나 계몽의 끝은 어디인가. 그는 수아로부터 한 차원 높은 ‘계몽’인 폴리아모리를 요구받는다.  수아의 요구에 현타가 온 그는, 그날 밤 홍대 클럽을 찾게 되고 거기서 한 남자, 정인을 만나는데.... 여기서 이야기는 급물살을 탄다. 러브크래프트 덕후인 그는 클럽에서 정인이라는 또다른 러크 덕후 동족을 만난다. 그 순간 홍대 클럽 안은 러크 속 크툴루의 신화가 작동하는 시공간으로 변모한다.  광기의 산맥에 이른 그는, 정인을 통해 사악한 기운이 흐르는 마의 렝 고원에도 이르게 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 그 너머로부터 쳐들어오는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그 역시 정인처럼 크툴루 신화 속 주문을 사용한다.  그 주문이 그간 자신이 지켜온 세계를 외부와 완전히 차단하는 의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세계를 향해 나아가려는 그 자신을 지켜주고 보호해 달라는 의미인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젠더, 페미니즘, 폴리아모리, 성차별, 성평등, 가부장제, 성 소수자…. 현실에서 버젓이 통용되는 주제가 소설에서 더 이상 새로운 주제로 통용되지 못하는 이유는 왜일까.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그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이 보다 새롭고 신선할 뿐 아니라, 유쾌한 매력까지 더한다.  어쩌면, 이 글을 다 읽고 나서 이렇게 주문을 외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크툴루 프타근, 크툴루 프타근….이시경
너의 색은 나는 SF물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김보영 작가의 작품만 읽는 정도다. 태생이 문과고,수학과학에 영 소질도 관심도 없어서 그렇기 때문일까. 그렇기 때문에 SF물은 어려울 것이란 선입견을 날 가지고 있다. 영화는 물론이고 소설도 마찬가지다. 그런 상태에서 이 작품의 '작가의말'과 '미리보기'를 보았을 때 역시 괜히 또 맞지 않는 옷에 눈독 들이는 건 아닌가, 우려했다.그럼에도 묘하게 당기는 매력과 흥미가 있었기에 읽어내려갔다. 우려는 기우였다. 작가의 폭넓은 독서관과 사고를 짐작할 수 있는 여러 흥미로운 지점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무엇보다 술술 잘 읽혔다. 막힘없이. 이건 비단 문장의 가독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서사의 매끄러움, 구조와 전개의 적합성이 모두 맞아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색이라 부를 수 없다..."처음 들어보는 표현이었지만, 제목에 쓰인 것도 그렇고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작품의 '핵'이 아닐까 싶다. 로봇이 자의식을 갖고, 인간과 대등해지거나 넘어서는 그 순간. 인규와 뮤는 서로에게 무엇이었는지, 지극히 '인간적인' 질문을 끊임없이 던진다. 그게 이 작품 내내 흐르는 사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다른 작품에 흥미를 갖고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든 소설이다. 출간예정인 소설집에도 기대를 품는다.  이상헌
이토록 새로운 이토록 새로운 '퀴어'소설이라니.  읽고 나서 첫 번째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다. 퀴어소설은 비단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의 소수성을 다루는 문학만을 이야기 하지는 않는다. '폴리아모리', 다자연애 관계를 맺는 이들에 관해 다룬 이 소설 역시 퀴어소설이라 나는 생각한다. 인종차별주의 등 갖은 혐오로 점철되었다고 평가받는 작가 '러브크래프트'를 소재로 빌려와 폴리아모리를 다룬 작가의 접근이 신선했다. 평소 퀴어소설을 많이 쓰는 나로서는 작품을 읽기 전 작가의 말과 미리보기를 봤을 때부터 뭔가 느낌(?)이 왔다고 해야 하나, 이 작품은 내가 반드시 읽을 것이라는 어떤 주문 같은 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러브크래프트를 활용하며 차분히 전개되던 이야기가 삽시간에 서스펜스적인 면을 띠며 그야말로 러브크래프트의 소설과 닮은 공포를 발산하는 지점, 거기가 이 소설의 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사실, 오늘날에 퀴어소설은 여전히 부족하다. 더불어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를 다룬 글이나 예술, 매체는 더욱더 많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 <잠을 자며 부활을 꿈꾼다>는 반가운 작품이었다. 나는 시스젠더 남성 작가로서 이 작품이 짚어내는 현대 사회의 젠더 이슈에 대해 매우 공감했고, 돌아보며 생각해볼 점들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부활이란 무엇일까. 왜 '나'는 수아의 귀에 대고 부활을 꿈꾼다고 말한 것일까. 그건 다소 섬뜩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사랑과 새로운 감수성의 부활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러브크래프트'와 그의 작품을 떠올려보면 나름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로 수아에게 여겨지는 '나'에 내재된 어두운 자아(혐오, 차별을 하는)의 부활을 뜻하는 게 아닐까 선뜩해지기도 한다.  여러 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었다. 근래에 '새롭다'고 느낀 소설이 별로 없는데, 이 작품만은 예외다.  작가의 건필을 기원한다.  이상헌
퀴어 리얼리즘과는 결이 다른 퀴어 소설 이 작가의 「것」에 대한 리뷰에서 "다음 소설, 예약합니다!"라고 선언했으므로새 소설이 눈에 띄자마자 바로 구매해서 읽었다.선언적이고 도발적인 제목 얘기부터 안 할 수가 없겠는데「퀴어문학은 취급하지 않습니다」라는 제목은 직설적인 혐오를 표방한다. 하지만 소설의 내용을 읽어보면 퀴어 혐오는 타자에 대한 것이 아니라자기부정에 대한 반어적 표현이라는 게 분명해진다.다시 말해 혐오의 언어로 시작해 죄책감과 애도의 서사로 끝나는 일종의 밀실극이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서점은 심리적 수감시설이고1,549일이라는 기간은 자신에게 내린 형량이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애도의 기간이다. 2인칭 시점 ‘당신’을 잘 활용한 소설로서 독자들은 이 수감시설에서 일어나는 심리극에 동참하며공범이거나 증인이거나 재판관의 감정적 지위를 다양하게 경험하게 된다.퀴어문학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기존 퀴어와 분명하게 차별화된다는 점에서이 소설은 매우 현대적이며 낯설고 새롭다.박상영, 김봉곤 계열의 퀴어 리얼리즘과는 결이 다르고오히려 죄의식 서사나 폐쇄적 측면에서 카프카적 계보에 가깝게 느껴진다.스토리코스모스 카페에서 이 작가가 20대라는 걸 알고 놀랐는데그의 창작 스펙트럼이 어디까지 어떻게 펼쳐질지 기대된다. 계속해서 기다리는 즐거움을 주는 작가가 되어주길 기대하며!^^   책물고기
다음 소설, 예약합니다 ‘것’은 언어의 층위를 통해 인간 내면의 균열을 탐사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중심에 ‘것’이라는 이름을 내세우는데, ‘것’은 단순한 인칭 대체어이자 비인격적 지시대명사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존엄과 정체성을 박탈당한 존재의 은유로 기능한다. 사람이면서 사람으로 호명되지 못한 자, 그것은 사회적으로 삭제된 존재의 표식이다.작품의 화자 의지는 중학교 시절 방관자였으며, 그로부터 20여 년 후 ‘것’을 다시 만난다. 발톱 교정이라는 육체적 치료의 공간에서 시작된 관계,그것은 곧 내면의 고통, 죄의식, 모성의 실패로 이어진다. 내성 발톱이 살을 파고드는 장면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단순한 신체 묘사가 아니라 억눌린 죄의식이 ‘것’을 만나면서 내면으로 파고드는 상징적 형상화로 읽힌다. 발톱의 고통과 아들의 죽음, 그리고 ‘것’의 존재가 서로 얽혀 하나의 윤회적 고리를 만드는 것이다.‘것’은 인간이면서 사물로 호명된 자, 즉 타자화된 피해자이다. 그녀는 결국 ‘누군가의 것이었던 자’로 살았고, 이제는 스스로를 ‘그것’이라 부름으로써 인간성의 경계를 해체한다. 살 속으로 파고드는 화자의 발톱은 ‘자기 자신을 향한 폭력’이다.상처는 치유되지 않고, 도리어 더 깊이 파고든다.그것은 육체적 고통이자 죄책감의 육화(肉化)로 읽힌다.아들을 죽인 아이와 과거 자신이 방관했던 ‘것’이 겹치며 “죄의 순환”과 냉혹한 카타르시스가 완성된다.가해와 피해, 방관과 연민, 치료와 파괴의 경계가 흐려지는 서사를 통해 작가는 인간이 ‘스스로의 것’이 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비극을 완성한다.갓 등단한 작가의 신작을 읽는 일은 일종의 모험인데등단작과 등단 이후의 첫 발표작인 <사물 연습>에 이어이번 소설 <것>에서도 이 작가는 나의 관심과 기대를단순한 호평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키게 만들어 주었다.소설의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내성발톱을 설정하고그것을 긴장감 있게 엮어 나가는 솜씨 또한 일품이었다.다음 작품을 예약하고 싶은 작가,오랜만에 설렘을 느끼게 하는 신인작가를 만나 기쁘다.​    책물고기
존재하지만 쓰이기 위해서는 타의 것을 필요로 하는 *작품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것은 의존명사죠. 자립형태소이지만, 자립성이 없어 홀로 쓰일 수는 없죠. 그러나 단어로 취급하긴 해요. 저는 그런 사람이에요. 분명 사람인데, 혼자 서거나 존재하진 못하는. 그런 게 것이에요."  소설의 도입부에서 꽂힌 문장이었다. 국어국문학 전공병-관련 지식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증상이다-이 도지는 바람에 이 의미심장한 문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작가는 '이해'의 영역에 대한 소설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 도입부가 가진 의미가 소설 속에서 어떤 이해관계로 드러나 있을지 호기심이 생겼다.자고로 이해관계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인물들의 관계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는 심상치 않다.  주인공 '나'와 '@Gooooood'('것'이라고 불러달라 했으니 이하 것으로 통칭)의 관계는 미묘하다. 학창 시절 친하게 지냈지만, 어떤 계기로 '나'는 '것'과 멀어졌다.'나'를 방관자로서 학교폭력의 가해자 범주에 들여야 좋을지 아닐지, 사람마다 생각하는 바는 다를 것이다. 어쨌든, 네일샵에서 '나'와 '것'은 다시 만났지만, 서로 존대를 해야 할 만큼 사이는 멀어졌다.'것'은 서로 존대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것'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그녀의 닉네임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니 동창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간극을 훌쩍 생략할 수는 없을 것이다.'나'가 어색하든 말든, '것'의 말처럼 서로에게 이로운 것이겠지. 이 관계성을 생각하며 '나'가 처한 상황을 본다면 참 아이러니 할 것이다. '나'의 아들 '현욱'은 죽었다. '현욱'은 학교폭력의 가해자였다. 그것도 피해자를 때리고, 돈을 빼앗을 정도로 적극적인. 결국 피해자 학생이 칼로 찔러 죽였다. 거기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뒤집혀버렸다. 하지만 아들이 죽었음에도 '나'는 피해자로 입장 전환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해자(학교폭력 피해자이기도 한) 부모로부터 폭언과 저주를 듣게 된다. 무릎 꿇고 선처해달라고 빌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은 빗나갔다. '현욱'을 죽인 애를 봤을 때에도 현욱의 잘못을 떠올리기보단 '이렇게 소심하고 한심한 애가 우리 애를...'이라고 생각한다. 그 애의 이름을 들었음에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와 '것'이 마주하며 학창 시절 멀어졌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것'은 자신을 원망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왜 떠날까 원망했지만 깨달았다고. 의지('나'의 이름) 씨의 것이었음을. 자립하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자신의 쓰임을 다해 스스로 멀어진 것이므로 원망하지 않았다고. 또다시 '뭐뭐의 것'의 뭐뭐를 찾아다녔다고. '나'는 '것'에게, 자신의 아들이 칼에 찔려 죽을 만큼 잘못한 거냐고 묻는다. 이 지점에서 둘의 관계성 역시 역전되는 듯하다. '나'는 무슨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걸까? '것'은 대답한다. '의지 씨 아들은, 그냥 재수가 없었던 거예요.'라고. '나'는 '것'에게 용서받고 싶었을까? 그렇게까지 잘못한 건 아니야, 그런 대답이 듣고 싶었을까? 그렇게 함으로 인해 현욱의 잘못 역시 원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었을까? '나'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의존명사이자 자립형태소가 되는 장면 같았다.혼자 서거나 존재하지 못하고 타인의 이해에 의존해야 하는.  이 소설에서 눈에 띄는 다른 장치는 '내성발톱'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 '내성발톱'은 '죄책감'을 상징하는 장치처럼 느껴졌다. 끝이 안쪽으로 휘어 들어 살갗을 파고들어 계속 아프게 하는 것. '나'는 소설 초반부부터 '것'에게 내성 발톱을 교정 관리 받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욕조에 발을 담그고 있는 순간 잘 관리 받던 발톱이 통째로 빠져버린다. 발톱은 새로 자라니까 기다리는 편이 좋다는 조언을 보지만, '나'의 전화에 '것'은 발톱을 들고 자신에게로 오라고 말한다. '것'을 향해 가던 '나'는 그제야 '것'의 이름을 생각해낸다. '대상'에서 '존재'로 둘의 관계성이 전환되는 지점을 본 것 같았다.   작가의 의도와 장면의 의미를 거듭 생각하면서 읽는 재미가 있었던 작품이었다. 읽고 나서의 여운이 깊은 작품을 보여준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된다. 박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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