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내게 "지금 이 시대에 문학이 왜 필요한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이 소설집을 내놓을 것이다.
-홍기돈(문학평론가)
책소개
엄창석의 소설은 견고하고 진지하다. 존재와 신, 운명과 우연, 의식과 무의식, 예술과 예술가 등 만만치 않은 주제를 끝까지 밀고 나가며 인간의 존재 의미를 성찰한다.
개별 인간의 구체성에 천착하며 인간이라는 존재, 인간의 실체에 좀처럼 육박해 들어가지 않는 게 요즘 소설의 경향이라면, 엄창석은 그 반대편에서 정면승부를 걸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근원에 대한 강렬한 물음을 던지는 여섯 편의 소설은 촘촘하게 직조된 구성과 아름다운 문체에 힘입어 탁월한 미적 성취를 획득한다.
한국소설사에 이렇게 다양하고 다채로우면서도 견고하고 진지한 주제의식을 천착한 작가와 소설은 드물다. 완성도의 측면에서도 이 소설집은 한국문학사를 위해 길이 아로새겨 둘 필요가 있다.
작가의 말
흔히 하는 말로, 단편소설은 글로써 빚어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예술 양식이다. 그러다 보니 한 작가에게 문학 미학의 정수이고 집념의 결정이며 걸어온 궤적의 지도이다. 방대한 양의 책을 쓴다는 것은 쓸데없이 힘만 낭비하는 짓이라는 보르헤스의 전언까지는 동의 못 하더라도 단편소설이 저마다의 기법과 유희와 정념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집약체인 것만은 분명하다.
사실 나는 그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상태로 시대적 경향이 강한 단편을 쓰곤 했다. 시대마다 고유하고 특수한 진실이 있다는 동시대적, 혹은 고현학(考現學)적인 미신에 홀려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의 단편들, 이를테면 공장 파업, 시위, 후일담을 다룬 작품 따위들은 애꾸눈 조랑말이 끄는 마차에 실려 내가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내 소설이 흐르는 시간을 견디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에 좀 퇴색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었는데, 바로 여기에 실린 여섯 편의 단편이 그것들이다.
「몸의 예술가」는 불교 등에서 말하는 윤회의 의미에 천착해서 쓴 소설이다. 「고양이가 들어있는 거울」에서는 탐정소설의 형식에 환상을 가미하여 존재의 미로를 드러내고자 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에드거 앨런 포의 「검은 고양이」와 마경을 결합시킨 것은 아마 관념의 유희일 것이다. 「쉰네 가지 얼굴」은 체제에 순응하지 못한 범죄자의 끝없는 도주에 관한 이야기다. 글을 쓰는 동안 카인 이래로 무수한 도망자들, 가령 람피앙, 카루소, 일지매 같은 이들이 내 곁에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해시계」와 「비늘 천장」은 조선조를 시대 배경으로 한 것이다. 「해시계」는 메타소설과 무관하지 않다. 독자는 거기서 상징주의란 것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비늘 천장」에는 「쉰네 가지 얼굴」만큼 작가로서의 나의 의식이 많이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쓰는 동안 아팠다.
이 여섯 편의 소설을 스토리코스모스에서 웹북 단행본으로 묶어준다고 하니, 기쁘고도 송구스럽다. 앞으로 좀 더 힘을 모아 더 나은 소설을 쓰겠다고 약속드린다.
목차
쉰네 가지의 얼굴
해시계
고양이가 들어있는 거울
호랑이 무늬
비늘 천장
몸의 예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