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

수상작

  • 단편 당선작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명희진
  • 단편 당선작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범기
  • 단편 당선작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성호
  • 단편 당선작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상현
  • 단편 당선작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 단편 당선작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 단편 수상작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

기획 분재

+

웹북 단행본

+

열편시집

+

에세이

+

리뷰

가장 연극과도 같았던 어느 현실의 밤   제목을 보자마자, 내가 이 소설을 좋아하겠거니 싶은 소설이 가끔 있다. 취향이란 편협한 요소에서 발단된 것이기는 한데, 어떤 본능과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눈길이 가는 제목, 이런 이름을 달았다는 이유만으로 설레는 작품. 작가가 이 아름다운 언어의 나열을 멋지게 형상화했기를 기대하게 만드는 작품. 구효서 소설가의 <그녀의 야윈 뺨>이다.   소설은 서른여덟 살 어느 연극배우가 18년 만에 첫사랑과 재회한 어느 밤을 중심에 두었다. 결혼도 하지 못하고 예술가로서 서른여덟이 된 주인공과 미국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는 여자. 둘은 대학 시절 미팅에서 만났고, 오랜 기간 연애를 했지만 잠자리는 가지지 않았다. 뻔한 표현이기는 하나, 둘은 서로에게 순수한 사랑, 청춘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남녀 주인공이 환상과도 같은 대학로의 밤으로 입장한다. 돌아가며 노래하고. 서로 박수를 쳐주는 사람들, 공연이 있고, 관객이 있고, 춤추는 젊은이들로 가득한 거리의 정경이 화려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현실은 화려한 대학로와 내내 대비된다. 남자는 이제 현실보다도 연극으로 산 기간이 훨씬 길다. 그에게는 정체성의 상실이 덤덤하다. 현실이 아닌 연극 자체가 토대가 되어 가는 연극판 속, 이제는 차라리 현실이 혼동되었으면 한다고 생각할 정도이다. 그 옆에 여자는 결혼 후 야윈 뺨만이 선명하다.   현재 시점 대학로의 보여주기는 두 사람 앞에 청춘을 애달프게나마 되살려 보려는 작가의 시도로 읽혔다. 지독한 현재와 낭만적인 과거가 대조되며, 애달픔이 차오른다. 그럼에도 옆자리 테이블 넥타이 부대와 다툼하는 철없는 주인공, 상처에 반창고를 붙이고 웃는 남녀에 피식 씁쓸한 미소가 지어진다. 서른여덟이 되어 하는 인생 3번째 싸움, 떼거리로 맞으면서도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로구나,’ 하고만 생각하는 주인공의 소년성이 되레 아프게 읽힌다. 이런 대비가 효과적으로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그게 독자인 내게 그대로 전이되었다.   커다란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데도, 서글픈 감정이 점점 쌓인다. 그 원인은 주인공의 현실뿐만 아니라 뭔가 미심쩍은 첫사랑의 야윈 뺨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가족들과 살고 있다는 그녀는 내내 뭔가 미심쩍다. 토로하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녀의 대사 하나하나, 행동 하나하나가 부자연하다.   두 사람의 밤 이후, 남자 여자의 현실을 수소문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그녀의 야윈 빰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어떤 마비의 흔적의 의의가 선명해지는 순간, 사무치는 감정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현실을 목도하고는 본인의 현실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남자의 뒷모습이 애석하다. 그러나 비난할 수가 없다. 그렇게 비난할 수 없는 독자인 나마저, 애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야윈 청춘을 이리도 서정적으로 그려낸 작품이 반가웠다. 내 편견이 오랜만에 제대로 작동한 것 같아 기쁘다. 리뷰를 마치며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야윈 뺨밖에 생각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구름
어떻게 거미까지 사랑하겠어, 엄마를 사랑하는 거지 한때 SNS에서 유행했던 질문 챌린지(?)가 있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거야?' 라고 물어보는 질문에 답변을 듣는 것이었다. 유행이 한창 돌 때는 흥미가 없었는데, <마망>을 읽고 궁금해져서 재미삼아 엄마한테도 질문했다. '엄마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 할 거야?' 라고.  아빠의 대답은 뻔하게 예상이 됐다. '그런 걸 왜 물어보노?' 그래서 안 물어봤다. 근데 이상하게 엄마는 뭐라고 대답할 지 예상이 안 됐다.  엄마는 별 고민 없이 이렇게 대답했다. '모습이 변했을 뿐, 결국엔 내 딸이니까 안 죽게 잘 키울 거야'  이시경 작가의 <마망> 도입부를 읽으면서 SNS에 유행했던 바퀴벌레 질문이 바로 떠올렸다. 이 소설에서는 바퀴벌레 대신 거미로 변하지만.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이 생각나기도 했다. 당연하고 마땅했던 존재가 갑자기 낯설게 변한다면? 이 질문은 창작자의 입장에서는 제법 클리셰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때로는 배우자가, 때로는 자식이, 때로는 부모가 낯선 존재로 변하는 이야기. 그리고 저 질문에는 두 가지의 함의가 숨어 있다고 느낀다.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지 말자'는 메세지, 그리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줬으면 하는 소망'  <마망>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소설은 그 함의들을 가장 선명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대상인 '엄마'가 거미로 변하면서 시작한다. (왜 하필 거미일까? 라는 질문에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마망'이라는 거대한 거미 조형물을 한 번 보고 오시는 것을 추천드린다) 소설 내용은 스포일러 같아서 자세히 밝히지 못하지만, 거미가 된 엄마 자영의 처지는 꽤나 비참하다.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거라고 생각했던 가족들이 사실 존재의 역할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오는 배신감, 역할을 담당할 존재가 사라지자 바로 대체자를 들이라는 남편의 '마망' 시어머니의 모습에서 오는 분노, 소설에 묘사되는 모든 상황이 지극히 현실을 모방하고 있다는 생각에 드는 무력감 등. 그리고 어느덧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있는 독자들에게 물음표를 선사하는 결말까지.  개인적으로 이 소설은 출발점인 질문(당연하고 마땅했던 존재가 낯설게 변한다면?)이 가진 함의 두 가지를 철저하게 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학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한다. 주인공 자영의 가족들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한 존재를 잃었고(잃다 못해 대체해버리기까지 했다), 거미가 된 자영까지는 사랑하지 못했다. (거미가 된 자영은 있는 그대로 사랑받지 못했다) 대신, 자영은 자유와 고유함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영이 자판 위를 열심히 오가며 쓴 소설이 결국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까. 한편으로는, 이시경 작가의 다른 스타일도 엿볼 수 있었던 것 같다. 잘 짜여진 기존의 소설들에 비해 <마망>은 뭔가 비어 있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공백을 독자 스스로 사유하며 채워본다면 더 풍부하게 읽힐 것 같다.  마지막으로, '내가 바퀴벌레로 변하면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에 대한 엄마의 대답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질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 때문에 엄마의 대답을 섣불리 예측하지 못했다. 소설 <마망>에서 보여준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대답을 들려주는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해보며 독서를 마친다.   박은비
쇼츠 같은 다섯의 이야기 김덕희 소설가의 <디에스 이라이>를 좋게 읽어 구매한 소설이다. 단편 가격인 1,000 코인인데도 목차가 다섯이나 있어 놀랐다. 뒤늦게 작가의 말을 확인해 보니, 엽편과도 같은 짧은 ‘스마트 소설’이 모인 것이었다.   오히려 좋다. 한정된 분량으로 3막 구조, 기승전결이 담긴 소설을 쓴다는 것은 작가로서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지만, 점점 짧아지는 미디어에 익숙해지는 요즘, 독자로서 반가운 일이다.   스마트한 소설이라는 말답게, 편리하고, 독자 친화적인 이야기집이 아닐 수 없다. 가볍고도 재미가 보장된, 그러면서 생각할 거리도 제공하는 다섯의 이야기였다. 쇼츠처럼 짧지만, 무의미한 쇼츠와 다르게 세상과 삶, 세태에 대해 독자로서 사유할 거리로 넘쳐났다.   그러니까, 재미있고 의미도 있으며, 경박하지도 않다.   가성비 좋은 소설이라고 할까. 세상의 변화에 맞춰 이런 시도가 있는 것이 흥미로웠고, 오랜만에 편하게 독서할 수 있어 좋았다.   추천을 위해 각각 이야기들의 내용과 짧은 감상만 남긴다.   수압: 집을 보러 간 젊은 남자와 수수께끼 집주인 노인의 이야기이다. 공포 구전처럼 읽힐 수 있는 이 소설은 부동산 세태를 무섭게 풍자하고 있다.   배를 팔아먹는 나라: 투표권을 정당하게 양도양수할 수 있는 법안이 발휘되고, 그걸로 일어나는 반대급부로 소설은 이어진다. 조선업 강국인 대한민국, vote와 boat의 차이, 정치적 무관심. 소설을 읽고 고개를 돌려 세상을 둘러보라. 혹 스토리코스모스 사이트에서 벗어나 네이버 메인으로 가보길. 많은 걸 느낄 수 있을 터.   별의 거짓말: 게스트하우스 사장과 그전 약속을 지키려 찾아온 젊은 여인의 짧은 재회를 그린다. 청년세대의 방황, 무심한 시대정신, 그것을 아름다운 밤하늘로 낭만적으로 은유한다. 수많은 별의 이미지가 아름답다.   초대의 매너: 갑자기 나갈 수 없는 이상한 단톡방에 초대된 남자, 모르는 사람 끼리 단톡, 이어지는 정체불명 살인극이다. 가장 분량이 길고 흥미진진하기도 하다. 카프카 <변신>의 도입부라든지, 시시포스 같은 닉네임의 상징을 하나둘 살피다 보면, 작가의 효율성, 꼼꼼함과 함께 초대의 매너란 제목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된다. 또한 그 아이러니는 제로섬 게임 중인 우리 사회와 딱히 다르지 않다.   보물: 보물-인류의 고귀한 유산-을 숨긴 남자가 압수수색을 받는 이야기다. 남자의 욕망, 박과의 심리 싸움이 이어지다가, 커다란 갈등이 터진 뒤 마지막에 보물을 어루만지는 주인공의 이미지는 인간의 본성을 선연히 드러낸다.   짧은 문학이라는 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미만을 위하는 것이 아닌, 인생과 인간에 대해도 다뤄야 한다. 뛰어난 스토리텔링과 독창적인 상상을 기본으로, 문장마다 두어 개, 혹 네댓의 의미가 복무해야 하고, 쓰는 이는 극도의 절제와 계산, 전에 없던 스마트함과 효율성을 요구받는다.   이런 시대적 요구가(최소한 문학가들에게는) 약간 창작자 착취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작가가 그 어려운 일을 해 주었다. 순문학 입문자, 혹은 복잡한 공법과 진중한 담론에 지쳤거나, 날이 너무 더워 조금 가볍게 독서하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reader
부조리한 실존을 근사하게라도 은유하는 이야기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는 삶과 죽음에 대한 집요한 작가의 시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죽은 건가 산 건가 싶은 부조리한 삶. 소설 속 모든 인물은 당연한 듯 찾아오는 태풍을 견디는 중이다. 힘듦과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채 악몽보다 더 악몽과도 같은 현실을 살고 있다. 계절의 끝이자, 시작과도 같은 어느 불행의 굴레에 빠진 상태이다. 실존하는 우리 모두가 그렇다.   소설은 사시사철 붉은 단풍나무에 가로막힌 창의 풍경으로 시작된다. 남편 진우와 아내 수정, P 세 인물을 중심으로, 장모와 아랫집 여자까지 더해 여러 삶이 죽은 나무의 가지들처럼 엉키는 그림을 그린다. 수정의 암, 장모의 결혼과 이혼, 자살 기도, 아랫집 여자의 스토킹 등. 소설의 현재 이야기는 7년 전 사건을 중심으로 운동하고 있다. 물론 이런 소설이 운동하는 것은 이야기의 힘보다는 삶 그 자체로 보아야 옳다.   이런 소설은 감춰진 서사보다 대사 하나하나를 음미하는 것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인물의 심적 회로를 따라가는 것에서, 그 깊은 맛이 우러난다. 염세적이든, 낭만적이든, 실존하는 우리 모두의 삶은 부조리하다. 속에 연결된 듯 보이는 인과는 우리 실존의 덧없음을 선명히 할 뿐이다. 해피엔딩도 반복되면 슬픔이 되고, 인간 사이 오해와 불소통은 끊이지 않고 지속되며, 우린 그걸 수도 없이 반복해야 한다. 죽지 않는 이상.   이 소설에서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끝내 제시되지 않는다. 사건의 전말은 발설되지 않고 살짝 비치고 끝난다. 그게 되레 이 소설의 희망으로 작동하는 건 흥미로운 아이러니였다. 이유는 어쩌면 제시되지 않아야만 한다. 그게 차라리 우리를 살리기도 하니까.   진우의 작은 의지와 함께 소설은 마무리되고, 질문은 독자에게 넘어간다. 어떤 빛의 가능성 정도의 인상으로. 그러니 터널 속에서 이야기는 끝난 것이다. 허나 작가의식의 돛은 어떤 빛에, 뭔지 모를 희망을 향해 있다고 보았다. 자신의 비겁함에도 아이에게 사랑한다 말하는 진우와 바스락대는 소리가 전부 위로인지도 모른다는 문장, 또 앞을 꽉 가로막은 단풍잎에서 시작된 소설이 종국에 아이들의 단풍손에 도달하는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서, 부조리한 삶에 대해 독자로서 직접 곱씹고 자문하게 되었다.   부조리는 계속될 것이다. 삶은 이미 그 자체로 부조리하니까.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는 아마 없을 것이다. 다만 마지막 진우처럼 ‘살아야 할 이유 같은’ 무언가는 계속 생겨날 것이다. 억지로라도 만들 수 있기도 하다. 독서 후 이런 ‘빛과 같은’ 마음이 내 속에서 피어나는 경험은 값진 것이었다.   끝으로 이 소설은 부조리극의 성격을 띠는 여타 작품들처럼 잡지식을 끌어다 모아 분위기를 잡지 않았다는 점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덧붙이고 싶다. 쓰는 이의 정성과 절제되고 잘 계산된 장면만으로 이루어진 구성으로, 작가의 선명한 개성과 깊은 예술성으로, 집요하고도 의연한 작가정신을 만날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구름
진실에 가닿는 작은 흔적들 되도록 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의미가 퇴색된 지 오래이기는 하나, 독자 입장에서의 소설적 기본값은 아름다운 문장과 서사적 긴장, 그에 따른 재미에 마지않을 것이다.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에 집중하고, 예기치 못한 반전에 놀라고, 여운이 남는 결말을 맞이한다.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읽는 아름다운 문장과 묘사, 사건과 장면, 이후에 문득문득 깨닫게 되는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사유. 그게 활자 서사 예술의 기본이고, <북두칠성의 복사점에 관한 사적 견해들>은 그런 기본을 상기해 주는 소설이었다.   소설은 주희라는 아이가 ‘그들’이라는 존재에 의해 사고를 당한 이후를 그린다. 주희의 부모, 숙부와 숙모까지 네 명의 어른이 가평의 오래된 별장에서 ‘그들’로부터 주희를 보호하는 것이 표면적 서사라 하겠다. 어른들은 경고하듯 주희에게 주입한다. ‘그들’은 사납다고, 어떤 흔적과도 같은, 불안이 묻은 존재라고. 배후에는 할머니의 묘한 죽음이 깔려 있다.   독자로서 독서의 시작은 이랬다. 재난과 재해에 대비하는 어른들을 보며 ‘그들’이라는 환상적 요소가 섞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식 소설이겠거니. 허나 어른들 사이 부딪는 태도, 스산한 묘사, ‘소리가 나지 않는 곳이 없는’ 별장의 공간으로 빨려 들수록, 독자로서 묘한 불안에 사로잡혔다. 불안이 고조될수록, 읽고 지나친 퍼즐 조각 같은 요소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숙모의 사고, 할머니의 죽음, 사고로 잃은 주희의 기억, 상속에서 제외된 어른들 등. 종국에는 머릿속에 수놓인 퍼즐 조각들이 북두칠성처럼 하나의 그림을 완성했다.   인물들이 일제히 가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독서 내내 고민하다가, 끝에 그 답을 발견하는 일은, 충격적인 비밀의 폭로를 목도하는 일은 커다란 카타르시스였다. 작가는 이미 가장 큰 단서를 초반에 심어두었고,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 놓았다. 호불호가 딱히 없을 긴장과 반전. 재미였다. 모두 이따금 숨을 참게 되는 이 소설을 즐길 수 있으리라. 그렇게 몰입하다가, 소설이란 매체의 기본값마저 되뇔 수 있으리라.   더 이상의 스포일러보다는 소설의 낯선 공법에 대해 조금 들여다보면 좋겠다. 재미가 보장된, 하나의 진실로 모여드는 구성을 취하고 있으나, 그 구성은 도식적 뼈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가는 그 전통적인 구조에 적확히 자신의 의식을 이식하고, 그런 재미의 흐름에 공명의 흐름을 중첩하는 세련된 방법론을 취했다. 표면은 이면을 은유하는 사적 방법론이며, 진실 또한, 작가의 의식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실체가 소설 초반에 무엇이었나 기억해 보고, 소설 종국에 무엇이 되었나를 목도해 보면, 이 소설의 본질을 감각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전반에 끼얹어진 불안과 진실로부터 도망치는 무수한 작은 몸짓들의 합일을 통해, 어떤 실체를 보게 될 것이다.   또한 작가의 필력이 뭐랄까. 대단히 압도적이다. 우아한 문장과 화려한 묘사, 하나하나 손으로 꾹꾹 눌러쓴 듯한 문장들. 이런 작가는 최근에 더욱 귀하다. 언어만으로 아름다움을 달성하는 일, 그게 활자 예술의 특권이고, 영상이나 음악 같은 여타 다른 매체와 구분될 수 있는 소설이 지켜야 할 부분이라 느낀다. 어느 장을 펴도 아름다운 문장, 어느 부분을 읽어도 리듬이 느껴지는 문단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이야기, <북두칠성의 복사점에 관한 사적 견해들>이 내게는 그랬다.   보기 드문 문장가의 소설이었다. minimum
적응이라는 억압과 도태되고 사라지는 것들  되도록 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남자는 실업 후 1년을 무직으로 지내다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런데 그는 딱히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아내가(당연한지도 모르지만) 더 시끄럽다. 소설은 그의 재취업에 따른 아내와 주변의 반응에 집중함으로 되레 남자의 존재를 조명한다. 정체 없는 인간. 세련된 방식의 도입으로 빠지듯 독서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대단한 실의나 우울에 빠진 인간처럼 보이냐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 그저 피로한 중년남자. 지나가다 한 번 볼 듯한 사람, 너무나 일상적인 한 폭의 그림 속 인물3 같아 되레 애정이 가는 인간. 헌신적이되, 그 탓에 도구처럼 사용되는 서글픈 남자.   그런 남자가 삶을 떠돌다가, 노인을 만나며 사건이 벌어진다. <캄브리아기의 달빛 아래>는 일상적인 인물과 이야기를 극히 낯설게 그려내는 소설이다. 구피와 삼엽충이라는 알레고리를 통해.   작가는 소설을 위해 강으로 떠밀려 간 구피와 멸종당한 종을 불러온다. 종은 어쩌다 멸종을 맞게 되는 걸까. 기후 변화, 포식자, 지형학, 자연재해, 이유는 다양하겠으나, 역사는 이 모두를 망라하여 간단히 ‘적응에 실패했다’고 정리하곤 한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어떨까. 우리도 멸종위기종과 다를 바 없이 수많은 것들에 치이며 살고 있다. 주인공 남자로 예를 들면, 다니고 싶지 않은 회사, 돈 문제, 남편 노릇, 사랑이 식어가는 아내, 쌓이는 시간과 죄어 오는 남의 정체성까지. 거대한 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끼인 현대인은 멸종을 앞둔 동물과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른다. 적응해야만 하는 시스템 속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된 인간은 사라질 뿐이다. 소설은 그런 우리의 현실을 극히 낯선 알레고리를 통해 그런 다시 보게 해준다.   소설 속 남자는 노인을 통해 화석이 된 캄브리아기의 돌레로바실라쿠스와 구피를 번갈아 보게 된다. 이어서 자기 자신을. 종국에는 그로테스크하면서도 환상적인 어느 합일이 이루어진다. 시간의 두께가 부드러워지며, 소설의 경계도 부드러워진다. 층위는 무너져 내리며 우아하게 융합한다. 압도적인 하나의 이미지가 완성되고, 남자는 어느 달빛 아래 서게 된다. 진정한 탈피, 라는 말이 떠오른다. 감탄이 나오는 마무리였다.   결말이 참 재미있는 소설이라 읽은 후 후회가 남지 않는다. 아주 먼 두 요소를 중첩하는 작가의 층위가 새로웠고, 예상치 못한 결말이 압권이었다.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 읽다가, 작가의 의식을 함께 사유하다가, 끝에 뒤통수를 맞는 이런 소설을 만나면, 독자로서 늘 기분 좋은 뒷맛을 챙기게 된다.    minimum
신경계가 고장난 세계 속 도망을 권고하는 사회 범죄라고 부르기도 뭣한, 거리에서 어깨를 강하게 부딪치고 사과 한마디 없이 떠나는 이가 종종 있다. 그 부딪힘은 고의적 폭행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부족해서, 피해자들의 반응은 나뉘게 된다. 똥 밟았네, 하고 지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과 정도는 응당 받아 마땅하다 여기고 나서는 이가 있다. 하지만 묘한 폭력의 순간이 아닌, 그 권익을 찾는 용감한 행위가 유해한 결과로 이어진다면 어떨까. 도망치는 이가 이기는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 정경은 어쩌면 현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소설 <노커> 속 작가의 상상으로 생생히 서사화되어 있다.   소설은 다정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원체 정의로운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치고 뻔뻔하게 떠나는 이에게 다가가 과실을 묻는다. 허나 그 순간, 다정은 불가해한 인지 장애 상태에 놓이게 된다. 말도 하지 못하게 된 딸 다정을 위한 엄마 민주의 조사로,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소설의 사건은 광범위해진다. 정체불명의 범죄는 모방 범죄까지 생겨나며 사회에 창궐한다. 희생자는 늘어난다. 과실을 물을 이는 희미해져 간다. 당국의 먹이 주기 금지 권고, 내 몫을 따져 묻는 것이 문제라는 인터넷 방송인, 가짜 노커와 소송 등등. 그로테스크한 상상을 필두로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확장된다. 독자로서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여타 추리소설과 다르게 답을 갈구하지 않게 된다. 커지는 사건에 독자로서 속절없는 심정이 되고 만다. 그 심정 속에 이 소설의 핵이 담겼다.   판타지 속 희망을 찾지 못하는 와중, 흐르는 서사, 확장되는 사건과 화두는 너무도 친숙하다. 당국의 어처구니없는 권고와 맞지만 처맞기도 하는 말을 방송인들. 회피를 조장하는 사회 분위기. 피해자가 목소리를 높이는 것으로 파생되는 2차 가해. 너무나 익숙한 일들 아닌가?   코로나가 가속 페달을 밟은 노출 미디어의 시대, ‘도망을 권고하는 사회’는 이미 창궐해 있다. 과실을 따질 수 없는 사고는 무수하고, 어그로를 끌어 돈 버는 일이 당연하며, 다정의 아버지처럼 책임 소재만 묻는 어른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이미 본질과 멀어진 지 오래고, 여러 중요한 부분은 고장 나 있다.   용기를 내는 것, 희망을 부르짖는 것이 무용한 세상. 책임 없는 악의가 마구 번지는 세상. 소설은 그 자체를 이야기로 전달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겠다. 여기서 작가의 의식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노커 같은 불가해한 현상의 창궐보다도, ‘타인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거라는 이타적인 불안이 끼어들 틈 없는 세상’이라 느꼈다.   더는 과실을 물을 이도 없고, 여러모로 망가진 사회인 것이 사실이다. 허나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통해 현실을 다시 보고, 바로 보며, 끊임없이 경계해야 한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불소통과 오해가 당연시되는 사회의 종착은 총체적 기능 마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작가의 입담에 대해 짧게 덧붙이지 않을 수 없겠다. 간결한 형식을 두고, 매력적인 문체로 이야기를 능수능란하게 펼쳐 나간다. 능청스러운 언어유희와 독보적인 필치,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문장이지만, 개인적으로 소설 내내 발산하는 작가의 매력을 음미하며 읽었다.   노커처럼 후드 속 보이지 않는 얼굴이 도처에 깔린 무서운 세상이다. 소설을 통해 현시대를 다시 볼 수 있어 의미가 깊었다. 민주의 시선을 따라가다가 세상에 무력해지고, 끝에는 그녀와 함께 무한의 권능을 지닌 깍두기가 마법을 가져다주기를 기대하게 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즐거운 독서였다.    츠지
현실보다 더한 되도록 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소설은 때때로 현실을 초과한다. 그게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 혹은 극한의 비극이어서가 아니다. 작가가 세상을 적확히 이해하고 있을 때, 또 그 이해를 바탕으로 깊이 사색했을 때, 궁극적으로 그게 서사라는 미적 가치로 환원되었을 때, 소설은 현실을 잡아먹고,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는 예술 작품으로 탄생한다.<점심은 없습니다>는 제목부터 한국인이라면 감각이 곤두세워지지 않을 수 없다. 한 많은 민족. 밥은 꼭 챙겨 먹고 다니라고 인사하고, 밥이 보약이라고 말하고, 밥심을 늘 강조하는 사람들. 우리에게 제목부터 점심은 없다고? 그건 너무하잖아…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소설은 유란이라는 점심 식대를 제공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사원의 이야기이다. 그 속에는 계급과 차별에 대한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이어지는 수많은 비극들. 정규직의 텃세, 무시, 견제 등. 읽은 이의 마음을 쓰라리게 만든다. 재수 없는 주변 직원들에 친구의 이야기를 듣듯 나도 화가 나 버리고, 유란을 응원하게 된다.허나 그런 비극을 비극처럼 표현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 소설의 빛나는 부분이며, 이 소설이 진짜 현실보다도 현실 같은 이유이기도 하다. 작가의 문장은 통통 튀면서 덤덤히 차별과 불합리함을 전하지만, 유머러스한 톤을 잃지 않는다. 이런 작가만의 톤이 여타 리얼리즘 소설의 지리멸렬함, 구구절절함과 차별된다고 보았다. 이렇게 자기연민 없이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또한 그런 당당함이 이 소설을 현실보다도 더 현실처럼 만들기도 한다. 비극이라고 주저앉아 울기만 하는 어른이 현실 속 그리 흔한가. 슬프지만 사회에 속한 어른이라면, 유란처럼 유머러스하게 친구에게(독자에게) 풀듯 해소하는 것이 더 현생에 밀접해 있다. 그녀는 본인에게 ‘입사 축하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어른이고, 그런 어른이 비극에 어떻게 유쾌하고도 현실적으로 대처하는지가 소설 속에 있다.유란이 종국에 더는 차별을 참지 못하는 폭발하는 장면은 독자에게 커다란 해소로 다가온다. 독자로서 가슴이 뻥 뚫리는 경험이었고, 시원한 욕지거리를 뱉는 유란에 마음이 놓였다. 그녀가 앞으로도 본인을 잘 지킬 것만 같아서. 모두들 유란처럼 정글 같은 사회 속 어른스럽게 본인을 잘 지킬 수 있으면 좋겠다. 취업이든, 작은 성취든, 자기 자신을 축하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작가만의 목소리로 현실을 잡아먹는, 빼어난 성취를 이룬 소설이었다. minimum
동해안의 진실은 이토록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특이한 기질을 가진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단 한 번도 진실한 사랑을 해본 적이 없고, 실천보다는 상상을, 아는 상태보다 모르는 상태를 선호한다. 소설의 말을 빌려 ‘자기 혼자 되풀이하는 숨바꼭질’의 심리적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하겠다.그런 남자가 32살에 비로소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 가족도 사랑하지 못한 그에게, 사랑은 얼마나 큰 의미겠는가, 커다란 도파민이겠는가. 그런 격동의 감정의 힘으로 이 소설은 구동한다. 동해안의 황홀한 정경을 따라.소설의 핵은 ‘진정하다’라는 말에 있다. 진실. 남자의 불안정한 심리는 어떤 무거운 진실에 대한 공포에서 기인한다. 그 공포에 대한 트라우마가 평생 이어져 특이한 기질을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을 버린 생모, 다섯의 새어머니, 무관심한 아버지, 그리고 생모와의 이별의 순간. 로드무비 속 남자의 트라우마의 전말이 조금씩 밝혀지는 것으로 소설은 진행된다.진실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빼먹을 수 없겠다. 진실은 무엇인가. 그건 어쩌면 남자의 성격으로, 소설의 형식으로 상징화, 형상화되어 있다. 딜레마. 진실은 있으면서 없고, 없으면서 있고, 확신한 순간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망각이라는 단어에 부정적 뉘앙스가 있기는 하지만, 남자의 사연을 읽고 있으면, 망각으로 버텨지는 삶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부러 망각하는 일, 혹은 사랑과 감정에 속는 일, 그건 어쩌면 진실보다도 삶을 지탱하는 데 능하다. 진실은 그 자체로 이미 딜레마니까.그렇게 망각으로 버티던 남자의 정열적 사랑. 남의 말을 듣고도 믿지 않는 용기로, 믿어 의심치 않는 자기 감정으로, 또 150KM 속도의 사랑으로, 정면 돌파하는 단단한 마음이 이 소설 속에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어떻게 부수어지는지도. 판도라의 상자가 어떻게 열리는지도. 말끔한 플롯과 상상할 수 없는 반전, 아름다운 문장, 이야기의 순수 재미를 필두로 즐겁게 독서할 수 있었다.‘나도 내 삶을 타인의 삶으로 대체하지는 않았나,’ ‘음험한 길을 망각하기 위해 혼자 어떤 술수를 부려댄 걸까.’ 여러 질문이 남는다.또한 작가가 동성애적 코드를 사용하는 방식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적 문제는 서사적 목적 아래 반전의 기능을 가지고 이야기에 복무 중이다. 여타 소모되는 퀴어문학과 비교해 보면, 작가의 방식이 얼마나 세련되었는지, 작가의 내공이 어떻게 쓰여야 올바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어떤 시류에 편승한 것이 아닌, 본질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진실에 대한 사유, 질문, 작가적 전략, 고급한 공법 이전에,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달리는 것의 황홀경을 선사해 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독자로서 우선 전달받은 것은 남자의 마음이다. 그에게 이끌려 작가가 펼친 길을, 문장과 이미지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처럼 나도 산산조각 부서지는 경험까지도.이야기 속의 감정을 그저 느끼는 것, 그걸로 아는 걸 다시 보게 되는 것, 논설과는 구분되는 것, 그게 소설이 아닌가, 새삼 생각되었다.‘진실은 이토록 아픈 것이로구나. 또한 사랑도.’ 복잡한 사유, 작가의 능숙한 기교나 형식 이전에, 이 정도로 감상을 정리하고 싶다. 그게 내가 독자로 느낀 것의 핵이자, 이 소설의 핵이고, 예술 작품의 핵이 아닐까 싶다. 구름
물이 나를 물었다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소설 제목이 ‘바다’가 아니라 「물」인 이유를 곰곰 생각하며 읽었습니다.일본인 스쿠버 다이버 사카미즈가 자기 일터인 인도네시아의 바다에서 겪은 사연. 이것이 「물」의 주된 이야기입니다. ‘일본인’과 ‘인도네시아’의 등장이 자연스럽게 ‘쓰나미’(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2004년 인도양 지진해일)라는 세 글자를 떠오르게 합니다. 이야기의 생동감과 핍진성을 담보하는 요소입니다.사카미즈의 사연을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아파트 6층 높이의 해일이 연안을 덮쳐 인명 피해를 일으킨다, 바닷속에서 근무 중이던 다이버는 천재(天災)를 운 좋게 피하여 살아남는다, 이를 계기로 일을 그만두고 도시의 수영 센터 강사가 된다, 바다에서의 끔찍한 경험에 현재의 삶을 잡아먹히지 않도록(“살면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것들은, 이따금 마주해두는 편이 나아.”) 해변 풍경 포스터를 집에 걸어둔다, ⋯⋯.바다에서 수영장으로, 물의 자연에서 물의 시설로 이직한 셈입니다. 규모와 안전성의 차이가 있기는 할 테지만 바다든 수영장이든 다 같은 ‘물’입니다. 이름에서부터 물(水, 미즈)을 머금은 이 스쿠버 다이버는 어쨌거나 물을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인가 봅니다.일본어 사전에 ‘사카미즈’를 검색하니 ‘열극수(裂隙水)’라는 풀이가 나옵니다. ‘지하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공간에서 공간으로 이동하는 물’을 뜻하는 지질학 용어라고 합니다. 이 낱말을 소설 「물」에 흘려 보낸다면, ‘내게 보이지 않고 내가 어찌할 수도 없는 어떤 거대한 삶의 흐름’ 정도로 여과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바다는 벗어났지만 또다시 물-수영장에서 생업을 이어가야 하는 사카미즈의 처지와 썩 잘 어울립니다. 소설 제목이 ‘바다’가 아니라 「물」인 이유를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독자로서 제가 꼽은 「물」의 백미는 ‘백상아리 이빨’ 에피소드와, 대단원 부분에서 사카미즈가 ‘GH’라는 인물(아마도 인도네시아 해변에서 파도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을)을 회상하는 장면입니다.소설 속에서 몇 차례 언급된 것처럼 백상아리는 인도네시아에서 서식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웬 수상한 노파는 백상아리들의 이갈이 후 해저에 침전된 이빨들을 찾아내라 닦아세웁니다. “비명횡사한 내 아들을 위해서”라는 이유를 대는 걸로 보아 백상아리에게 자식을 잃은 모양입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는’ 듯합니다. 그 바다엔 존재하지도 않는 어종을 ‘아들을 물어 죽인 것’으로 상정한 심리 상태. 이 노파에게 바다의 이미지란 백상아리 혹은 백상아리의 이빨로 남고 만 것이 아닐까요. 노파가 얘기한 사연의 진위 여부는 소설에서 그리 중대하게 다뤄지지 않는데, 저는 이 지점이 「물」의 소설적 아름다움이라고 느꼈습니다. 바다에 이빨이 있다, 바다는 사람을 물어 죽인다, 물이 나를 물었다, 라는 상상력의 확장을 구현하는 장치라서요. 사카미즈가 바다 밑바닥에서 건지려던 ‘이빨’이란 사실, 누구나의 삶을 멋대로 가학하고 사라지지만 아무런 흔적도 실체도 파악되지 않는 ‘불행’인 것입니다. 애초에 형체 없이 닥치는 불행이, 고작 얼마간의 물질로 발견될 리가 만무합니다.「물」의 두 번째 백미는 그 위치 선정 또한 더없이 적절합니다. 하필 소설의 마지막에, 이야기의 끝자락에 스-윽 떠오르듯 나타나는 것입니다. 소설 속 장면을 빌리자면, 마치 파고가 지나간 뒤 해수면 위로 “얼굴을 물속에 박은” “몇 ‘구’”의 사람들이 너울대듯.GH라는 인물 또한 ‘백상아리 노파’만큼이나 수상쩍습니다. 스스로 살인범임을 밝히는데, 이 역시 노파의 백상아리 목격설처럼 진짜인지 아닌지를 따져 물을 성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사카미즈가 그에게 겁을 먹었고, 그리고 그가 사카미즈가 소지하고 있던 백상아리 이빨(‘이것과 똑같은 걸 찾으면 돼’라는 일종의 견본으로 노파에게 받은)을 가져갔다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이빨은 사카미즈에게 ‘찾아야 할 것, 하지만 매번 찾는 데 실패하게 되는 것’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재확인시킵니다. 그러니까 「물」의 공식을 따르자면 바다-물, 백상아리, GH는 모두 ‘이빨을 가진 존재’이자, 사카미즈 입장에서는 찾아내고 규명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럴 때마다 그를 물고 마음속 잠연한 심해로 끌고 들어갈 괴물이기도 할 것입니다.‘나한테 대체 왜 이런 불행이 닥친 것인가⋯.’이 짧은 탄식이 바다이자 물이고, 백상아리와 GH의 이빨이 아닐까, 하고 감상했습니다. 소설 마지막에 사카미즈가 남긴 다음의 말은 그래서, 바다 같고 물 같습니다. 잠잠한데, 그 밑으로 백상아리가 입을 벌리고 있을지도 모르는.“그런데 그 인간이 거기 어디서 물에 잠겼다면 말이야, 인도네시아 바닥 어딘가에는 정말로 백상아리 이빨이 있겠군그래.”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의 어찌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생활인, 또는 생존자의 소설 속 최후 발언이 이토록 무섭고 쿨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독자로서의 의견입니다만, 사카미즈의 저 말이 없었다면 「물」은 지금보다 얕았을 것 같습니다. 기시 유스케의 「아귀의 논」이나 「푸가」와 같은, ‘마지막 한 방’이 독자의 소설 읽기 감흥을 한껏 끌어올리는, 독자의 긴장을 끝내 풀어주지 않은 채로 (좋은 의미의) 찝찝함을 안기는 이야기였습니다.​ 임재훈
운이 좋아야 하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독서를 할 때, 작가의 성숙한 사유 그대로가 위로가 될 때가 있다.운은 무엇인가. 정리할 수는 없지만, 결과에 따라 좋고 나쁨이 정의되는 것은 확실하다. 그게 제아무리 모호하더라도,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답은 반대의 가능성을 동반한다. 그게 좋은 쪽의 상상이든, 나쁜 쪽의 상상이든, 그 자체는 어둠인지도 모른다고, 이 소설은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그걸 그저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 삶인지도 모른다고.<운이 좋았네요>는 사고를 시작으로 긴장감 있게 뻗는 서사와 적절한 반전으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단편이었다. 아이의 사건을 중심으로, 그 내막의 가능성을 나열한다. 장인, 아내, 주인공, 장모, 돌보미 등은 서로를 탓하고 있다. 네가 그랬으면, 그때 그랬다면, 하며. 작가는 그런 나열의 공법으로 의식을 뚜렷이 하다가, 반전으로 주제를 관철시킨다. 끝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아버지와 주인공이 동일시되며, 하나의 우아한 이미지로 근사한 형상화를 달성한다.불행을 마주한 인간이라면 이런 수많은 가정의 나열을 경험하지 않은 이가 없을 터이다. 그때 내가 이랬다면, 그때 누가 그랬다면, 하늘이 어땠다면, 운이 좋았다면, 지금이 조금은 나았을까, 하고. 그런 가정은 미련과 다를 바 없이 유해하다. 아이 혹은 트럭 기사의 끝처럼, 인과는 결과에 의존할 뿐이니까.그렇다면 그런 삶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낚싯대를 던져 놓고 앉아 있던 아버지의 이미지가 강렬히 남는다. 그는 정적 속에서 무언가를 헤아리고 있었던 걸까. 그건 어떤 불확실성을 대하는 삶의 태도를 은유하고 있지 않나 가늠해 본다. 운이 좋았다, 운이 나빴다, 로 정리되는 삶이 어디 있는가. 과거 가정의 상상으로 갉아 먹히는 현재를 누가 원하겠는가. 가늠하고, 상상하고, 운 따위로 슬퍼하기에는, 우리 모두 실천하는 삶이 치열하다.끝에는 독자인 나도 주인공 찬영처럼 비로소 궁금해졌다. 어둠 속 아버지가 보던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작가에게 제대로 전달받았다. 배울 수 있었다. 어떤 지나간 불확실성에 의존하기에는 삶은 너무 아름답고, 소중하다는 사실을.아름다운 사유가, 소중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구름
나도 밥먹고 사는 인간입니다 <나도 똑같이 밥 먹고 사는 인간입니다.>        직장인의 애환이 담긴 소설은 처음 읽었다. 참치집 회식을 하는 풍경이나 개개인의 직무에 어울리는 말투와 대화들, 신선하고 잘 읽히고 정말 그럴 것 같아서 히죽 거리며 읽었다.     주인공 유란은 계약직이다. 그녀는 회식에 목숨을 거는 듯 식탐이 있다. 지난 소고기 회식에서 몸무게 내기를 해, 체중계를 챙겨 회식을 향한다는 그 장면도 웃프다.     50만원 내기에서 이긴 유란은 대뱃살 한 점이 남은 상황에서 웃음꺼리가 되어도 스스로를 가오나시라고 하며 먹는다. 그녀에게 그 한 점은 단순한 참치가 아니다. 스스로 먹는 것의 주인이 되어, 누군가가 먹어도 되는 마지막 한 점이라면, 지위고하를 떠나서 먼저 먹겠다는 의지다. 통쾌하다 못해 감동적이었다.     유란을 응원하지 않을 수 없다. 점심은 없습니다, 라는 메모가 분명, 직급의 차이, 사회에서의 불이익 같은 제도의 문제다. 하지만, 내기에서 이긴 사실로 유란의 성공이라고 본다. 점심이라는 의미가 계약직에게 불리한 차별라는 걸 안다. 하지만 대뱃살 한 점을 먹는 유란, 몸무게 다이어트에서 이긴 유란, 나는 그녀가 당당한 삶을 산다고 믿는다.     시대에 뒤쳐진 조직의 제도가 문제지 유란은 결코 뒤처지거나 부족하지 않다. 그녀는 차별 받을 수 없고 억눌러질 수 없는 한 인간인 것이다.     “나도 똑같이 밥 먹고 삽니다.”    유란이 소리치는 소설이다.  후기: 잘 쓴 소설, 재미있는 소설, 뭐라도 좋지만, 소설을 읽고 이렇게 푹 빠져 보긴 오랜만인 듯 합니다. 강추합니다. 혜섬
부딪는 분노와 애도마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읽은 후 대단히 자포자기한 심정이 되는 소설이 있다. 막대한 에너지들의 부딪힘, 악의, 슬픔, 열의, 그것에 독자로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어 다음날 혹 그다음 날까지 남는 충격적인 소설, <노적가리 판타지>다.장애가 있는 성불구 동생을 둔 주인공과 아버지에 대한 복수심으로 동생과 결혼을 약속한 목사의 딸. 둘은 밀회를 즐기다가 동생의 자살을 마주한다. 이 소설은 설정부터 인간이 닿을 수 있는 가장 격한 감정과 부딪힘을 내포하고 있다.흥미진진하고도 무서운 서사와 별개로, 작가의 전략은 한 단계 위에 있다. 이런 믿을 수 없을 만큼 비극적인 현실은 이야기이다. 작가는 그런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란 환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안내하고, 그게 곧 현실이라고 직시하게 만든 뒤, 다시 환상으로 빠져나간다. 소설이기 이전에, 그게 뒤엉켜 사는 인간사이고,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자연이라고, 구조부터 주제를 피력하고 있는 것이다.그곳에 깊은 진실이 하나 숨어 있다. 배역. 삶은 그게 어떤 형태이든 다만 흘러가는 것이고, 겪는 것이다. 결론은 없다.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의 판타지와 같은 이야기니까. 우리는 어느 삶의 시나리오 속 하나의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소설은 시사하고 있다. 여기서 섬뜩한 질문이 솟아오른다.그렇다면, 소설 속 주인공이 느끼는 애도와 슬픔마저 연기인가?그런 인식에 다다른 순간, 소설의 에너지는 그대로 독자에게 전이된다. 나 역시 그런가. 슬픔을 연기하고 있나. 열의를 연기하고 있는 건 아닐까. 쉽게 떨쳐낼 수 없는 이야기의 힘이었다.한데 며칠이 지나고 보니, 이런 비극적 소설이 위로로 다가오는 건 왜일까. 아마 주인공이 ‘옛날에,’ ‘옛날에,’하며 이야기의 공간으로 사라지는 마무리가 이유인 듯하다.어떤 비극도 닥칠 수 있다. 우리는 애도마저 연기해야 하는 끔찍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허나 그 모든 것은 흘러가는 것이다. 그 누구도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정의되지 않고, 결말은 없다.없는 결말은 반대로 무한한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비극이든, 행운이든 ‘나’는 흔들릴 이유가 없다. 시나리오는 흘러가는 중이다. 배우가 인물로 인해 아플 이유는 없지 않은가.‘다만 겪는 과정’이라는 미치도록 성숙하고, 성숙하기에 아프기도 한 위로는 진귀한 독서 경험이었다. 츠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