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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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살아야 할 근사한 이유라도: 2025-2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명희진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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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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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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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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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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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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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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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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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북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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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편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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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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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꼬리처럼 붙은 이상한 것들 <꼬리 치지 마라>는 인간이 꼬리를 가지는 것이 당연한 근현대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이다.배경이 흥미로운 소설, 그러니까 작가의 아이디어가 시발점부터 빛난 소설은 대부분 간결한 서사만으로 새로운 감흥과 흥미를 일으키고, 알고 있던 것을 낯설게 다시 보게 해준다. 이 소설도 그런 축에 속하지만, 간결함 이상의 스케일을, 속 시원한 거대 서사를 갖추고 있다.주인공 태윤은 모두가 꼬리를 가진, 꼬리 이식술이 트렌트가 된 세상 속, 꼬리를 가지지 않은 인물이다. 사회의 제도에 따르지 않는 그는 이런저런 무시와 오해에 시달린다. 고집이 세든, 뭔가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이라는 등의 속절없는 인식에 갇히기도 한다.그런 태윤이 실은 순혈테일, 그러니 태어났을 때부터 꼬리를 가진 인간이었다는 것, 그 꼬리가 베일에 싸인 엄마라는 인물과 관련이 있다는 것으로 서사는 전개된다. 태윤은 꼬리라는 제도 안에서도, 테일테크라는 회사에서도 경계에 선 인물이다. 남과 달라 차라리 무결한 인물로서, 그는 현재의 직업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직업은 작고도 개인적인 사건과 버무려져 그 볼륨을 키운다. 전개가 빠르고 시원시원한 이야기이다.꼬리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사회를 그려낸 작가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그 속 아이러니와 어느 면에서는 무척 우스운 소설 속 세태를 즐기며 독서하면서, 섬뜩함이 몰려왔다.우리는 모두 꼬리를 가지고 사니까.사회가 만든 시스템 속 우리에게 따라붙는 것은 무수하다. 그런 제도의 의의는 무엇인가. 뭐든 그럼직하다. 이 소설 속 꼬리의 기능만큼. 허나 그 의의는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던가, 혹은 그저 만들어진 의의에 불과한가. 고민할수록 질문은 구태의연해지되, 인상 하나가 강렬해진다.이상하다.모두가 하기에 따르는 건 이상하다. 어떤 행위가 꼬리처럼 달라붙는 건 이상하다. 다르다고 배척하는 건 잘못되었다. 소설은 그런 이상함을 속 시원히 깨부수어 준다. 그게 작가가 던진 커다란 담론에 대한 해답은 아니라 생각되지만, 최소한 이 소설의 독자로서는 커다란 해소를 선물 받았다.소설을 읽고 모두 자신의 꼬리는 무엇인지 돌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츠지
아아(아이스아메리카노)의 새로운 얼굴   엄마가 죽었다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이 낯설지는 않다. 하지만, 부고라는 제목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함께 서사를 만들어간 소설은 새롭다. 부고와 아이스 아메리카노라니! 참 신선한 조합이다.  나도 얼죽아였던 시절이 있었다. 치아에 이상이 생기면서 차고 뜨거운 걸 섭취하기가 어려워졌다. 몸이 늙어가는 증거가 군데군데 나타나면서 낳아준 엄마를 생각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엄마도 나처럼 이렇게 늙어갔겠지. 한번도 내게 그런 표현을 안했을 뿐이었던 거구나, 생각한다.   이 작품에는 엄마의 이름도 내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면, 누구나 다 경험했을 것 같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아직 엄마가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할머니를 보낸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누군가가 아파서 요양을 하다 떠났을 수도 있을테니까. 심지어 내가 챙겨주던 음식을 좋아하던 반려동물이라도.  나는 설탕 없는 아메리카노를 좋아하던 아버지를 보냈다. 카페인에 약한 엄마에 비해 커피를 즐겼던 아버지. 그냥 문득 생각나서 인사 드리러 갈때면, 드라이브 쓰루에서 뜨아를 한잔 사간다. 부고: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내가 사랑하던 누군가를 보낸 사람이면 가슴이 저릿할 것 같다. 작가의 진솔함과 잔잔한 표현들이 요란하지 않게 감동적이다.  어느 것 하나, 맞다 맞어, 맞장구를 치지 않을 장면이 없다. 담백하고 순수하고 또한 아름다운 가족의 이야기다. 물론, 엄마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엄마의 쓴 인생을 말하지만, 그것이 슬프다거나 괴롭다고 징징거리지 않는다. 나는 작가의 그런 덤덤함을 끌어 안고 싶다. 나도 차갑거나 냉정한 자식이라 늘 마음에 죄스러움을 안고 산다. 아직 노모가 나를 간절히 원하는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오늘내일 가봐야 하는 걸 미룬다. 옆집 어른이 그랬다. 엄마가 살아 있을때랑 돌아가시고 나서 집에 올때, 너무 다르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엄마가 오늘내일 하신다. 그래도 보내드릴 준비를 할 수가 없다. 아마 가셔도 나는 보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아, 어쩌란 말인가.  이 작품은 나를 돌아보게 한다. 우리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또 그들을 보내야 하고. 소설이 존재하는 이유가 인간과 인생을 이야기 하기때문이라고 했다. 우리가 함께 뭔가 할 말이 많은 그런 작품이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오는데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땡긴다. 아니, 내일이라도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을 드시게 해야 겠다. 당신의 어머니는 무얼 가장 잘 드셨나요?혜섬
곱씹을수록 사무치는 재미있는 소설을 만났다.<두 번째 탄생>은 3기 대장암 환자인 중년의 남자가 자신이 임신했다고 주장하는 이야기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설정부터 기발하며,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상상이 아닐 수 없다. 볼록 튀어나온, 그로 인해 찢어발기는 통증을 담은 자신의 복부를 애틋이 쓰다듬는 평범한 중년 남자의 이미지를 상상해 보면, 이 소설은 이미 낯설고 재미있다.허나 이런 통통 튀는 현재 뒤 감춰진 것들을 생각해 보면, 마냥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는다. ‘도가 나한테서 다시 태어나려나 봐.’고통에도 해맑은 황석과 그런 황석을 여전히 사랑하고, 또 어떤 면에서는 지원하는 아내. 그사이에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도라는 아들이 자리하고 있다.아들이 죽고, 남은 두 부모는 상실과 트라우마, 죄책 등의 무거운 감정들을,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지탱하고, 방어하고 있다. 황석은 죽은 아들이 자기 배에서 다시 태어나리라 믿고, 아내인 화자는 조금씩 동조하기 시작한다. 황석이 미쳤다는 말에 남동생의 뒤통수를 후려치기도 한다. 그런 두 부부의 이야기에 독자인 나 역시 빨려들게 되었다.곱씹을수록 사무치는 감정들이 도드라지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소설이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하고 나도 모르게 생각하는 나를 발견하는 것은 진귀한 경험이었다. reader
손바닥에 바늘로 새겨서라도 기억하고픈 것들에 관하여 손바닥에 바늘로 새겨서라도 기억하고픈 것(출처-브런치, 임재훈 NOWer) 어렸을 때 자주 체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바늘로 손가락 끝을 따 주곤 했다. 쿡, 하고 굵은 바늘이 손가락 끝을 찌르면 금세 검붉은 피가 솟아났다. 이제 곧 좋아질 거야. 엄마는 그렇게 말했지만, 당시 나는 그런 행위와 말들이 다소간의 미신처럼 여겨졌다. 곧 죽을 것처럼 배가 아팠는데 이깟 바늘이 뭐라고. 여전히 바늘이 지닌 마법 같은 신비한 효험에 대해서는 반신반의한다. 한편으로 당시에는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린 것 같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심리적인 안도감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했다.  임재훈 작가의 「바날이 소설」을 읽었다. 바날이 이야기는, 근미래 ‘위안부 피해자 유가족 육필 원고 디지털 복원 사업’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외부 서사는 그러하지만, 내부를 들여다보면 ‘바늘’이 서사를 추동하는 핵심 소재이다.  서사에 들어가기 전, 잠깐 바날이를 검색해 보았다. 그러다 임재훈 작가의 브런치, 임재훈 NOWer에 접속하게 되었다. 브런치 글에서 바날이에 대한 어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수확을 얻었다. 작가가 챗gpt로 직접 작업한 바날이 소설 삽화 작업(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날이 소설을 쓰게 된 직접적인 작중 의도 같은 것들을 엿 볼 수 있었다. 손바닥에 바늘로 새겨서라도 기억하고픈 것. 시대는 흐른다. 많은 것들이 기억 속에서 사라지거나 잊혀져 간다. 저절로 잊히는 것들이 태반이다. 반면, 불순한 의도로 인해 ‘망각되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들도 있다. 바날이 이야기는, 후자를 다룬다.  불순한 의도는 강력한 마법을 지닌다. 그것은 마치 겉은 번지르르하나 속은 썩어빠진 음식과도 같다.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이에, 시야를 가리고 무의식에 침투한다. 그로부터 기억이 지워지거나, 전혀 다른 기억으로 변질된다. 그것은, 마치 진실을 가장한 망령처럼 집단의 무의식을 떠돌아다닌다. “학생, 배 아프지요?” 바날이 이야기에서 바늘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이다. 배가 아픈 주인공에게 한 할머니가 이렇게 말한다. 주인공의 아픔을 할머니가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것이다. 할머니는 바늘을 꺼내, 주인공의 손을 따준다. “여어기가 제주요- 올라가면 울릉도- 아이고야 잘 왔네- 백길 따라 이백 리- 오옳거니 독도라!” 쿡. 할머니의 바늘이 주인공의 손에 박힌다. 새카만 핏방울이 맺히더니 이내 검불그스름한 핏줄기가 흘러나왔다.  할머니가 주인공 손에 그려 준 노래의 지도를 따라, 주인공 손에 난 피를 따라, 어느새 서사는 흘러흘러 바날이가 살았던 과거의 시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바늘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만일, 할머니가 그날 바늘을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혹은 주인공이 할머니의 바늘을 거절했더라면, 바날이 소설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아주 사소한 바늘 하나를 통해, 주인공의 체기는 물론, 오랜 세월 불순한 의도로 인해 꽉 막혀 있던 주인공 내면의 무의식 통로가, 뻥~ 뚫리는 것이다. 그 통로는, 주인공이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역사적 진실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아주 오래전 한 섬에 살았던 바날이를 만나게 된다. 아주 오래전 대장장이 부녀가 이 마을에 살았다.  바날이 소설 속에, 또 하나의 바날이 이야기가 생성된다. 최초의 바날이 이야기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어느덧 이야기는 흘러 흘러, 주인공이 처한 현재로 되돌아온다. 그 결말 또한 인상적이었다. 바날이 이야기는, 이제 주인공의 몫으로, 더 나아가 읽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는가.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오랜 세월 막힌 체기를 뚫어주듯, 작가가 가진 바늘이 한 독자의 무의식을 관통했다. 이 소설을 통해 얻은 질문을 오래도록 곱씹어 봐야겠다.  한 가지 추가적으로 덧붙이자면, 임재훈 작가의 작품은 특유의 매력을 지닌다. 매번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다. 작가가 가진 어휘는 놀랍도록 풍부하다. 서사에 맞게, 주인공에 맞게, 마법의 어휘 팔레트를 가진 것만 같다. 비법이 무엇인지, 담에 작가를 만날 기회가 주어지면 꼭 물어봐야겠다.  바날이.  독자로서의 바람이 생겼다. 바날이가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한다. 고운 한복 저고리와 치마를 입고서, 주름진 이마와 얼굴에는 행복이 깃든 미소, 그리고 한 손에 든 작은 바늘. 정겹게 불러주는 노래와 손바닥에 그려준 섬의 지도를 따라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기억에 이르길 바란다. 이시경
몸으로 하는 사랑을 위하여   '러브체어'는 해석하자면 '사랑을 위한 의자'다. 하지만, 섹스를 위해 고안된 의자니까, 일차원적으로 사랑을 섹스로 혹은 섹스를 사랑으로 말하기는 쉽지않다. 하지만 그건 지금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러브체를 읽으면서 사랑에 대한 혹은 예술을 향한 열정에 대한 소설로 읽었다. 즉, 인간의 고귀한 열망.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해보면, 몸으로 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싶다. 심지어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건데. 이 작품은, 영화감독인 주인공이 시나리오가 잘 되지 않아서 J와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화자의 이야기를 듣는 둘은 별 반응이 없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중학생 시절 ‘러브체어’라는 단어가 적힌 시골 장면을 떠올린다. 거기에서 우리들의 추억이 소환된다. 그 당시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거의 다 구경했을 그 플래카드. 얼마나 생소하고 생뚱맞은가. 나도 봤다. 나는 방성식 작가의 이런 위트에 감동했다. 주인공은 그 이후, ‘러브체어’에 대한 환상이 생겼고, 심지어 지금은 그걸 만든 회사까지 찾아간다. 물론, 출시 후, 5년 즈음 됐을 때, 폐기?되었지만, 섹스와 러브체어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나는 ‘러브체어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웃다가 심각해졌다. 주인공이 꿈꾸는 것은 예술 영화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전혀 못 쓰고 있다. 영화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심난해졌다. 우리는 무언가를 원하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설령, 그것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야기 해본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좋은 결과물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러브체어를 찾아서’ 는 그런 면에서 성공적이라고 본다.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이렇게 소설로 완성되었고 아마, 주인공은 J커플의 체험을 통해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변화를 겪으면, 내가 숨 쉬던 곳의 공기가 달라지듯이, 그가 입에 문 담배 맛이 달라졌으므로. 몸이 바뀌었을까? 확실히,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인 모양이다.  ​ 혜섬
물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 물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 이 소설을 읽고 난 첫인상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뛰어난 활자 직조력과 매력적인 이야기 전달력으로 독자에게 스펙타클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한다.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쥔 채로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행여 부족한 리뷰로 감상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에 관하여’ 개인적인 후감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 어떤 트라우마는 아주 깊다. 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망각의 심해에 가라앉아 한때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교묘하게 파묻혀 사소한 흔적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끊임없는 진동과 파동을 일으키며, 한 개인 혹은 집단에 불가항력적인 파장을 일으킨다.  쉽사리 망각의 해저에 이를 수 없기에, 그 파장이 단순히 해수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서, 어쩌면 누군가는 무거운 산소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망각의 해저로 뛰어드는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소설 <물>은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소재로 다룬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인 나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과거에 내 룸메이트였던 사카미즈가 가지고 있던 해변 그림 포스터 뒷면에 적힌 문구를, 현재에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그 문구는 이러하다. 물은 진동한다.  소설 <물>에서 주인공 나는 사카미즈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달자로서의 역할만 한다. 철저한 거리 두기를 통해 관찰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말 없는 전달자인 내 기억의 파동을 타고, 이야기는 어느새 사카미즈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 인도네시아의 한 해안 지역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과거 기억으로부터 현재로 전환되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과거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내 기억이 재해석되는 과정을 겪으며, 그 과정에서 사카미즈의 이야기가 현재의 시간성 속으로 재소환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전환 과정을 통해, 독자는 어느샌가 에메랄드빛 넘실대는 인도네시아 해안가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물은 포스터 속의 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제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생명력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러한 물로 인해, 사카미즈를 비롯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서사는 최고조에 달한다. 서사뿐만 아니라, 바다에 대한 묘사가 실제 그 장면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현장감이 단연 압권이었다. 백상아리의 윗니야. 어떤가, 예쁘지? 상어 이빨 조각은 이 소설에서 물과 함께 중요한 소재이다. 이를 둘러싸고 죽은 이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자와 죽은 이를 망각하고 훼손하려는 자가 마치 대립 구도를 이루는 듯 사카미즈에게 갈등과 마찰을 일으킨다.  이후 사카미즈의 선택은 무엇일까……?바다는…… 틈틈이 보아두어야 해.  결말에 이르러 사카미즈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사카미즈가 직접 바다와 대면하는 장면이었다. 쉽사리 언급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지점에 서게 되었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으며 감정 이입이 되어, 이토록 무심한 바다가 얄밉기까지 했다.  * 이 소설은 물을 넘어 삶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인간의 의식이 다다를 수 없는, 깊은 심연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그것은 내 안에 내재된 심연으로 이어졌다. 가장 깊은 곳에 이르면 혹 사카미즈가 보았던 바다와 작은 상어 이빨을 발견할 수 있을까…… 두 눈을 크게 뜨고 틈틈이 보아 두어야 겠다.  좋은 작품을 만나게 해 준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이시경
두 번째 탄생으로 주인공이 이른 곳   도입부터 좋았다. ‘도’가 죽었지만, 입속의 알들은 흩어지고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아들이 죽어도 살아가고 먹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어떤 죽음은 달콤하다.   소설가를 꿈꿨던 아들이 썼던가, 하고 주인공은 문장을 떠올린다.   동태알은 고소하고 달달하다. 그것을 느낀 주인공은 무의식중에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쓴 문장을 떠올린다. 동태의 죽음이 인간의 미각에 달콤함을 주어서 떠오른 문장 같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죽은 아들을 한시라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주인공의 상태를 보여준다.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는 뭘 해도 아들을 생각하게 되는 거다.    남편 황석은 그래서 대장암 3기인데, 굳건하게 임신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도가 나한테서 다시 태어나려나 봐.  아들을 잃은 슬품과 그리움이 임신한 남편으로 잘 형상화 되어있고, 어떤 뻔한 말 없이 독자는 서사로 그 감정을 전달 받을 수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었다. 남편이 말하는 것은 진실일까 싶어서. 읽고 다들 확인해 보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결말이 특히 좋았다. 그 울음은. 언젠가 있었고, 진짜로 주인공의 귀에 들리는지도, 주인공이 내는 소리일지도. 결말까지 독자를 사로잡은 소설은 끝까지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왜 이 작품이 당선되었는지 알겠다.   결말에서 느낀 환상성은 본질에 닿았다고 믿는다. 읽으실 분들을 위하여 다 밝힐 수 없지만, 주인공에게 거듭된 고통이 어떤 지점에 이르렀는지 다른 분들과도 공유하고 싶다. 김유
사랑도 조립할 수 있을까 소설가는, 언어를 통해 영감의 바다로부터 전혀 새롭고 낯선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낯설고 새롭다는 것의 의미는, 인류 공통의 의식을 기반으로 하되,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낚아 올릴 것인가. 이 문제는 작가만의 스타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박은비 작가의 조립 가족을 통해 낯설고 새로운 스타일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바야흐로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시대이다. 경제적, 사회문화적, 그리고 정책적 요인 등으로 인해, 과거 대가족이 주를 이루던 시대로부터 핵가족 시대에 이르러, 1인 가구의 형태까지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로봇이라는 예상치 못한 존재가 우리의 일상까지 넘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후 우리의 가족 형태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까.  위 질문과 관련하여, 다시 작가의 스타일로 돌아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의미 있게 와 닿은 지점은 다음과 같다.  (박은비 작가 님의 소설은 매작품마다 독자에게 재미와 의미를 주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주기에,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는 덤으로 가져간다.)ᅠ그것은 바로 조립 가족이라는 말에서 그 해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는 누구도 사용한 적 없는,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단어이다.  신기하게도, 조립 가족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마치 앞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할 가족의 형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반려로봇과 AI가 만연한 시대에, 우리의 의식은 조립 가족이 보여주는 일상에, 이미 진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립 가족에서 젊은 부부가 로봇 아이를 대하는 모습은 진짜 인간 아이를 다루는 것과 동일하다. 그들은 로봇 아이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며 그만큼 '사랑'에 가까워지게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로봇 아이를 흙에 묻는 장면이었다. 기술 진화의 정점에서 '흙'이 주는 의미란 무엇일까. 조립 가족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으로 조립된 가족이 아니다. 오히려 파편화된 사랑을 통해, 가족에 내재하는 사랑의 원형에 대해 말해준다. 누구나 자식을 키우면서 겪을 법한 대내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기술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가족 사랑의 연대감을, 파편화된 조립 가족의 형태를 역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낚시를 안 해 봐서 잘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언어(言語)를 낚는 행위와 유사하다면, 이처럼 유일무이한 언어(言魚)인 '조립 가족'을 낚고 잘 가공하여 독자의 식탁에 올려준, 작가의 독창성에 감사를 보낸다.  솔트
누구세요?   인환은 식사 메뉴 쇼핑 리스트를 들고 마트 계산대에 서 있었다. 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아내인 아영이 재료 목록을 다시 보낼테니 메뉴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아내의 변덕에 지쳤다. 처가의 멸시와 아내의 허영을 참는다 하더라도 초단위로 널뛰는 아내의 기분은 지겨운지 오래다. 현관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건전지 빼놓은거 모르냐는 둥, 다시 누르니 작동이 되는 둥, 헤프닝이 일어난다. 아이가 경수네 갔다고 하는 말에,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안은 둘의 과거 음악을 같이 한, 아영이 정안의 중요한 연주회를 망친 아픈 과거가 있는 사람.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정안은 독일로 유학. 정안이 이미 집에 와 있고 인환은 어리둥절하다. 부주싸움을 하러 둘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아영의 전화가 울린다. 경수맘이란 전화를 받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문을 열자, 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가 엄마와 아빠를 다 닮았다고 한다. 등 뒤로 인환이 다가오고 문 밖의 여자가 누구세요? 하고 묻는다.   초대는 서사에 밀도감이 엄청나다. 이야기가 계속 물고 이어지면서, 그들이 현재 왜 이런지 알게된다. 그 안에 말 못할 사정들이 담겨있다. 치밀한 계획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남자 인환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섬세하고 불안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아내와 정안의 사연이 드러난다. 말 못한 사정들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지만, 말 못함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들이 보인다. 세사람의 인생이 그대로 비춰지는 듯 하다.  또한, 마지막에 부재중 전화가 네 번이나 찍혀 있어 어쩔 수 없이 받은 전화로, 현관을 열어 주었을 때, 문 밖의 타인이 오해를 하고 오히려, 아이 아빠인 인환에게 누구냐고 하는 장면은 소름이 돋는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모두. 이 소설의 백미다. 꼭 읽어 보길 추천한다. 혜섬
아이처럼 자꾸만 지껄이고 싶었다     모든 부모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란다. 아니, 인간이라면, 모든 생명이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도영은 이 부부에게 온 아이다. 도입부에서 무슨 테러 이야기인가 했다. 그런 장치들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전자기기와 심장이란 단어에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상상했다. '우리 도영이'라는 표현으로 부부의 아이구나, 짐작했고.   하지만, 처음부터, 전자 기기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프로그램, 초기화, 백업 데이터, 복구, 라는 등의 단어로 추측할 수 있었다.   "우리 도영이는 죽는 거예요?" 라는 위트있는 대화에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키드노이드 로봇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보시기 힘드시면 밖에 나가 계세요." 라는 대화에서 일종의 전복 혹은 동일시 하는 사물에대한 인격화를 느낄 수 있었다.   부부가 처음 조립을 하는 장면과 아이에게 작명을 하는 부분에서 진짜 자신이 낳은 아이 같이 하는 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영이 부부를 관찰함으로써 학습을 해나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자꾸만 떠들고 싶었다." 는 진술에서 아버지의 임종 직전에 나도 그랬다.   생명을 살리고 싶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말하고 싶으니까. 죽지 말라고, 살아나라고.혜섬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내가 있는 곳은 예비공간 나는 지난 몇 년간 히키코모리였다. 병원을 가거나 남자친구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일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최선을 다했던 직장생활에서 처참한 적응 실패를 겪었고, 그 충격은 실직으로 이어졌다.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채 방에 갇혔다. 방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어거지로 방 밖으로 나가도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진정제를 입에 털어넣고 심호흡하기 일쑤였다. 처음에 엄마 아빠는 나를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러다가 죽을까 봐 매일 방문을 열어 내 생사를 확인하셨다. 죽은 듯이 자고 있으면 코에 검지 손가락을 가만히 올려보시기도 했다. 정말이지 암울한 시절이었다.  방에 갇힌 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SNS였다. 나는 주변인들의 SNS를 염탐하며 열등감을 채워나갔다. 동창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결혼을 한 친구도 있었고 승진을 한 친구도 있었다. 내 자리는 이 곳, 고작 몇 평 남짓한 작은 내 방 안.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공격적으로 좋아요를 눌렀다면, 나는 좋아요를 절대로 누르지 않았다. 스크롤, 스크롤, 내 밑바닥을 향해 하루종일 스크롤을 내릴 뿐. 점점 밀폐된 곳으로 나는 내몰리고 있었다. 숨을 쉬기 어려운 나날들이었다.   그런 내가 히키코모리 생활을 청산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가상의 회사생활을 하는 청년모임활동과, 남자친구의 아르바이트 청탁이었다. 가짜 회사생활 놀이나 간단한 아르바이트조차 할 힘이 없을 정도로 나는 망가져 있었지만, 다만 내가 가장 간절했던 것은 하나였다.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가상의 출근을 하고, SNS에 출근도장을 찍고, 오늘 하루 무언가를 주절주절 끄적였던 '업무 증빙'을 하고, 가상의 퇴근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댓글을 달아 칭찬해준다. 간단한 규칙이었다. 그 규칙을 3달 동안 지키면 되었다. 처음에는 '이딴 게 무슨 소용이지?'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용기가 생겼다. 남자친구가 부탁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비난할 것 같다는 불안과 공포는,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에 사그라져버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긴장해서 손을 떨고 말을 더듬었지만 끝까지 해냈다.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SNS를 자주 하지는 않게 됐다. 주변인들을 염탐하는 일도 없어졌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나왔는지. 내 예비공간은 어떤 곳이었는지. 소설 속의 예비공간의 벽은 무너져내렸다. 주인공이 준비되지 않은 타이밍에 그런 사고가 발생해서 애석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준비가 되어도 힘든 '탈출'을 강제적으로 하게 되었다니. 그런 마음으로 이입하며 읽자 소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나처럼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낀다. 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 갇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주인공에게는 그게 예비공간이었던 것이리라.   언젠가, 준비가 되면, 스스로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예비공간의 본질이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하며 독서를 마친다. 단정하면서도 정확한 문장으로, 예비공간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잘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작품을 완전히 오독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오독도 꽤 괜찮다고 제멋대로 생각해보려 한다.     박은비
[단독] 그레고르 잠자가 외계인?! ⋯ 변신 예비된 현대인들 대충격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전지적 ‘실직 경험자’ 시점으로 작성한 리뷰임을 먼저 밝혀 둡니다. 소설을 얼마간 오독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그 오독 덕에 이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용케도 영어로 된 노랫말을 다 외우는 어느 팝송 리스너처럼요. 「예비공간」을 읽으며 오래전 제 실직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재취업 기간 동안 외출도 잘 안 하고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했었습니다. 그때 『변신』을 다시 봤습니다. 고등학생 때 ‘세계 명작 필독서’라는 이유로 어거지로 완독한 이후 첫 재독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고 출근 준비를 하려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해 있다, 그래서 자기 방 안에 갇혀 버린다, 동거하는 식구들이 문자 그대로 그를 ‘벌레 취급’ 한다는 설정. 세계 명작 필독서라서 억지로 읽었던 시점엔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 몰입감에 책을 쥔 양손이 후들거렸습니다. ‘이거 내 얘기네?’ 재취업에 고전 중인 실직자. 이 사회에 아무 쓰임이 없는 무직, 무소득. 하루아침에 사람에서 벌레로 변해 버린 존재.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 #세계명작 #필독서 #카프카 같은 해시태그를 다 걷어내고 오로지 ‘이야기’ 자체에 완전히 몰두한 읽기 체험. 실직 후 정독한 『변신』​은 제게 큰 위로였습니다.(역시나 카프카 본인도 직장 생활을 하며 소설을 썼다고 하지요.) 「예비공간」의 ‘예비공간’이 그 시절 저의 작은 방,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오도 가도 못하는 방과 겹쳐 보였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비공간」 속 주인공이 인스타그램 중독자라는 점입니다. 이 소설은 예비공간 이용자들—실직자(전직 방송국 PD), 게임 중독자, SNS 중독자—을 “외계인”으로, 그들과 정확히 대비되는 자들—멀쩡히 경제 활동 잘 해 나가는 이들—을 “현대인”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외계인 눈으로 보면 현대인들도 외계인일 테지요. “상단에 나열된 스토리들, 화려한 띠 둘러쳐진 개개인의 행성을 검지 하나로 탐사하겠다.”는 서술로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에게는 인스타그램 속 “프라하의 전경, 파인다이닝 코스, 주식 수익 인증, 갈아치운 애인과 네 컷 포토부스 사진들⋯⋯” 등속이 전부 외계/이계의 삶입니다. “불행이 거세된 외계에 친히 좋아요를 하나하나 눌러주겠다.”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처럼, 주인공은 자신이 갖지 못한 현대인/지구인의 삶-이미지마다 ‘하트’ 공격을 가합니다. 마치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삶들을 모조리 취할 수 있다는 듯이. 이런 손장난은, 소설 속 방송국 PD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같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리얼을 표방한 페이크’. 이를 소설은 대단히 시각적인 연출로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킵니다. “필터가 적용된 류는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기에, (⋯) 내버려 두었다. (⋯) 아이폰을 내렸다. 거기엔 그냥 류가 있었다. 도로 올리자 류는 단번에 괜찮은 류가 되었다. 괜찮은 류에게 좋아요를 누르기 위해 그의 이마를 연달아 두 번 찔렀다.” 그렇습니다. 가상의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나 먹히는 ‘손가락 하트 공격’ 따위, 현실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필터가 적용된 (⋯)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그야말로 ‘사람다운 모습’을 ‘공유’해 오는 데 실패한 주인공. 이러나 저러나 무직, 무소득의 외계인일 뿐입니다. ‘이거 내 얘기네?’하는 생각이 또 불쑥 생겨 버리면서 순식간에 「예비공간」을 읽었습니다. 일부 게으른 기자들이 쏟아내는 ‘팩트 노체크’ 기사들과 제목 낚시, 유튜브의 과다한 ‘어그로’ 콘텐츠와 섬네일, 인스타그램의 각종 ‘자의식 과잉’ 게시물들이 전부 「예비공간」이 이른 ‘필터’와 ‘리얼 표방 페이크’의 사례 아닌가 싶습니다.  올해가 제2의 IMF가 될 것이라는 경제 전문가들의 전망을 자주 접합니다.(부디 리얼이 아니라 페이크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현대인들은 모두 ‘변신이 예비된’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적 박탈감 유발’ 이미지들을 경계해야겠다는 각성을 문득 해 봅니다. ‘저렇게 살아야 사람다운 건가, 저렇게 안 살면 난 벌레인가.’ 하는 자격지심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소설 속 예비공간에 제 발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러니까 스스로 만든 마음의 밀실에 갇히지 말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예비공간」을 통해 제 실직 경험과 그레고르 잠자의 신세를 떠올렸고, 그러다 보니 영화 ⟨맨 인 블랙⟩에 나오는 바퀴벌레 외계인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새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짤 중에, 고전 소설 제목을 웹소설 느낌으로 바꾼 게 있더군요. 가령 『인간 실격』은 ‘재벌집 폐급 아들’, 『파우스트』는 ‘​S급 악마에게 집착당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입니다. ‘그레고르 잠자가 외계인이었다는 썰 푼다’ 「예비공간」의 제목을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혼자 피식했습니다. 최악의 구직난, 실업 대란이라는 요즘. 저를 비롯한 모든 분들의 일상에 필터링 없이 순수 지구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하길 바랍니다. 아무도 외계인으로 변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임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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