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구조가 어떻게 내면화되고 세대적으로 반복되는가를 매우 현대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한 소설. 사건 자체보다 폭력 이후 남겨진 심리적 퇴적층을 서사의 중심축으로 삼았다는 점이 기존 폭력 소설과 양상을 달리하며 낯설게 만들기를 구축한다. 폭력의 메커니즘을 집단적 놀이의 형식 속에서 포착, 폭력의 현장성보다 폭력의 잔존감을 정교하게 형상화한 작품.
넓고[廣] 평안[安]한 마을[里], 광안리는 정말 넓고 평안하기만 한 걸까. 한자 지명을 알고 난 뒤부터 광안리를 대할 때마다 들었던 궁금증이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에는 평안할 안(安)을 붙인 지명이 유독 많다. 그것은 어쩌면 평안하지 않았던 다른 측면을 역으로 반영한 건 아니었을까.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하고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사람의 내면에도 결코 평안하지 못한 아픔이 존재할 수 있다는 발상에서 이 소설은 시작되었다. 기억 속에 그런 구덩이가 분명 존재하지만 의식적으로 그것을 덮고 사는 인생―이 평안하지 않은 상황이 광안리라는 지명과 맞물려 이 소설은 잉태되었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다.
그들은 휴대폰으로 광안대교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거나, 하얀 티셔츠와 얼굴을 맞대고 나란히 누워 서로 사진을 찍어 주거나, 휴대폰에 얼굴을 파묻고 SNS에 올리거나,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노래를 부르며 하얀 티셔츠 몸 위에 쌓아 올려진 모래를 양손으로 탁탁 치면서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십여 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빨간 야구모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다.
“야, 야. 치킨이나 먹으러 가자.”
그러자 아이들이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그 말에 동조했다.
“나 배고파.”
“좋아.”
모두가 동의했을 때 빨간 야구모자가 하얀 티셔츠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치킨 먹고 올 거니까, 넌 여기 그대로 있어. 만일 우리가 다시 이 자리에 왔을 때, 네가 없으면 넌, 그땐 진짜 내 손에 죽는다.”
빨간 야구모자가 주먹을 꽉 쥔 손으로 한 대 내리치는 동작을 하며 하얀 티셔츠에게 경고했다. 그 말에 하얀 티셔츠가 모래에 파묻힌 채 입만 벙긋거리며 답했다.
“알겠어. 알겠다구.”
오후 두 시 경, 구월의 태양은 무심하게 해변을 달궜다. 오전에 불던 선선한 바람은 사라지고 어느새 뜨거운 열기가 모래를 한껏 달궜다.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히고 해변에 떨어지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다시 해변은 고요함을 되찾았지만 우린 더 이상 해변에 머물 수 없었다.
하얀 티셔츠의 얼굴 옆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렸고, 그것이 모래와 뒤엉켜 굳어 가는 게 보였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입 가까운 곳에서 모래가 아주 조금씩 무너져 내렸다. 나는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봤다. 반복적으로 밀려드는 파도가 그가 있는 곳까지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밀려들었다. 그의 몸 위에 쌓여 있던 모래가 조금씩 아래로 쓸려나갔다.
그때까지도 그는 반듯하게 누워 허공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이따금 눈을 깜박거리는 걸로 봐선 잠이 든 것 같지는 않았다. 허공에 뿌려진 햇살에 눈이 부신지, 그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찰나 그의 시선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우린 서로를 응시했다. 그러다 이내 그는 고개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때로 어떤 눈빛은 말보다 강한 언어를 담고 있다. 그의 눈빛이 그랬다. 그의 눈빛 속에 기쁨이나 슬픔 같은 건 없었다. 그것은 그저 모든 걸 완벽하게 체념한 듯한 눈빛이었다.
2023-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2024『소설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공저) 출간
2024『스토리코스모스 소설선 002』(공저) 출간
2026 에디터픽 시리즈01 /소설집『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출간
웹북 『데스밸리 판타지』 『나는 그것의 꼬리를 보았다』 『푸에고 로사』 『색채 그루밍의 세뇌 효과에 대하여』 『데니의 얼음동굴』 『나는 이것을 색(色)이라 부를 수 없다』『사평(沙平)』『마망』『내 소설의 비밀병기: 활자카메라』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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