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첩’이라는 매개를 중심으로 기억·기록·죄의식이 교차하는 상징체계를 구축, 절제된 문장과 정서의 잔향을 통해 독자의 해석을 호출하는 고도의 미학적 완성도.
범죄·불안·일상의 경계를 교란하는 서사 구조를 통해 선과 악 ·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을 해체하고 인간 존재의 모호성과 심연을 집요하게 파고든 작품.
계속 꿈만 꾸던 시간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때가 되지 않았다고 질책만 받은 것 같았던 시절이 눈앞에 지나갑니다. 오랜 시간 동안 쓴 글들을 놓지 못했습니다. 그저 나에게 ‘때’가 오지 않았다고 스스로 위로했습니다. 꿈속에서조차 발바닥이 땅에 닿도록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막상 현실이 된 이 순간이 꿈일까 자꾸 얼굴을 쓰다듬어 봅니다. 이 글에 손을 내밀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합니다. 나의 느린 행적을 믿어준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감사합니다. 느리게 시작한 만큼 길고 오래 나아가겠습니다.
[검은 수첩을 위하여]는 오토바이를 타며 느끼는 감정은 자유로움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실제로 오토바이 운전에 집중하는 순간에만 떠오르는 몇 가지 감정들이 있습니다. 감추고 싶은 불안감, 창피함, 어두운 생각들은 기분 좋게 달리는 순간에도 저를 놓지 않고 흔듭니다.
누구나 약자가 됩니다. 아무렇지 않게 살아간 들, 언젠가 숨겨놓은 것은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그 불안에 대해 말하고 싶었습니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두려운 것은 한낱 씹어 삼키는 초콜릿 조각에 불과하다고 위로해주고 싶습니다.
그는 너의 표정을 살피며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중국집 사장은 도박 중독이었다. 돈 문제가 여기저기 얽혀 얼마 전부터 자주 문을 닫았다. 중국집 사장에게 일수로 돈을 빌려준 피씨방 사장은 원금은커녕 이자도 내지 않는 중국집에 가서 매일 테이블을 엎었다. 너는 김 여사와 함께 드라마를 시청하듯 보며 저건 언제 끝난다니, 쯧쯧. 혀를 찼다. 그의 말에 가볍게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는 어지간히 추운지 연신 재채기를 하며 훌쩍거렸다.
‘귀신이 나올 것 같아요.’
‘귀신이 무서워요?’
‘아니요. 저는 사람이 제일 무서워요.’
‘맞아요. 사람만큼 지독한 것도 없지요.’
강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렸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너는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았다. 식당 배달 일하고 그와 커피를 마시러 나오고, 가끔 뭣에 홀린 것처럼 혼자 여행을 다니고. 추운 순간에 그 생각이 번뜩 들었다. 아등바등하며 살 필요가 없었다. 빚은 언제고 청산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정말 소송을 걸면 그만이었다. 너는 맥이 풀렸다. 아무것도 가로막힐 게 없는데 덜덜 떨지 말자는 생각 위로 그의 말이 붙었다.
‘나에게는 수첩이 있어요. 하루 동안 일어난 일을 적어요. 단어 몇 개만 있으면 장면이 되살아나죠. 대부분은 나쁜 일투성이에요. 인상착의나 이름, 차 번호, 전화번호를 적는다고 그들을 벌할 수 없지만, 그들의 행동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나는 잊지 않아요.’
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입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에 언뜻 비치는 그의 웃음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초콜릿을 꺼냈다. 비닐을 까서 너의 입에 넣어주고 그도 우물거리며 먹었다.
‘매일 당신의 안부를 챙기는 청과물 사장은 사실 범죄자예요. 한 달에 한 번 마약 밀매를 위해 낯선 사람들이 가게로 와요. 그리고 중국집 사장은 곧 사라질 거예요. 피씨방 사장이 주시하고 있어요. 통화하는 걸 들었어요. 사람을 샀대요. 무슨 의미인지 알겠죠?’
너의 오금이 쭈뼛거렸다. 너의 표정이 변한 걸 보고 그는 키득거리며 웃다가 손바닥만 한 수첩을 꺼냈다. 검은색 수첩을 촤르륵 펼치고 주머니에 넣었다.
총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