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사랑은 만남에서부터 시작한다. 자식과 부모, 형제자매, 친구, 연인 등. 그 만남의 형태도 다양하다.
사랑에는 선택하는 사랑과 운명적인 사랑이 있다는 것. 사랑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사실을. 소설을 쓰면서 알았다.
여기서 선택적 사랑을 말하려 한다. 도덕적으로 또는 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 안 된다는 것 외에도 소설 속에서도 말했다시피 거룩한 그분의 말씀에 반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분을 믿지 않은 사람은? 사회적 순리에 맞지 않다고 사랑을 포기할 것인가? 포기할 수 없으니 거리로 나선 것일 거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그들은 행복하다. 하지만 시선의 문제와 사회적 외면에 반항한다. 그들은 여전히 반항한다. 옳고 그르다 문제보다 자신들의 사랑을 인정해 달라는 거다. 글을 쓰면서 그들의 아우성이 들려왔다. 그 함성을 끝내 떨쳐내지 못했다. 사랑에 답을 얻지 못했다는 표현이 바르다.
내 가출의 아픔이 깊었나 보았다. 그들의 언짢은 말과 행동은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고 급기야 누군가 입에서 그럼 헤어지면 되겠네 했고, 작은아빠가 집을 나가버렸다고. 나는 그들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끈 같았다. 가정을 이루었다는 증거가 나인지 모른다. 내가 있으므로 완전한 가족관계가 되었으니까.
그들은 가정을 이루기 위해 법적으로 인정받고 싶어 미국에서 결혼했다고 한다. 자라면서 알게 되었다. 아빠만 둘이라는 사실이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자랑스럽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자라면서 자꾸만 숨기고 싶었으니까.
내가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하교 때마다 정문에 서성이며 나를 기다려준 아빠가 정말 싫었다. 내가 자랐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보호하고 돌보아 주어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가출하자고 결심한 것은 물론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해서다. 혼자 있는 시간이 왜 필요한지는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그냥”이다. 그냥이 좀 애매한 답변이지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또 가출의 동기를 확실하게 만든 것은 두 아빠의 대화도 한몫했다.
“여진이 데리고 올 수 있지?”
“또 나야? 오늘은 자기가 좀 해.”
큰아빠가 귀찮은 듯 말했다. 나는 혼자 집으로 올 수 있을 뿐 아니라, 혼자 뭐든 다 할 수 있는 중학생이었다. 내가 그들에게 귀찮은 존재라는 사실이 서글펐다. 귀찮으면서 뭐 하러 입양은 했는지? 반항하고 싶었다.
한 달 정도 가출할 생각이었으나 나는 이 주일 만에 돌아왔다. 편리함보다 불편함이 많았고 무엇보다 막막했다. 숙박 시설 이용도 술, 담배도 심지어 영화도 내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었다. 내게는 미성년자라 벽이 있었다. 나 자신이 아직 어리다는 걸 확인만 하고 돌아왔다. 조금은 싱거운 해프닝으로 끝났다.
동네 슈퍼에 들렀더니 주인아줌마가 깜짝 놀랐다. 나 때문에 두 아빠가 크게 싸웠다고 말했다. 항상 다정하게 어깨를 맞대고 걷더니…… 어느 날부터 함께 다니지도 않고.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각자 걷는 모습이 안타깝고 안쓰러웠다고 했다. 아줌마가 큰아빠에게 전화를 하고 아빠가 달려왔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귀싸대기를 맞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잘못을 용서받는 느낌이었다. 큰아빠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걸 처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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