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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방 안에 서는 법

소설 단편

박정은 2025-06-15

ISBN 979-11-94803-17-1(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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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객선이 가라앉아 수학여행을 가던 학생들이 익사하고, 핼러윈을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이 밀려 거리에서 압사당하는 세상이다. 지하철에 불이 나 승객들이 죽고, 쇼핑하러 갔다가 백화점이 무너져 죽고, 버스를 타고 등교하다가 다리가 끊어져 죽고, 폭설로 강당 지붕이 내려앉아 오리엔테이션 중이던 대학생들이 죽고, ……죽고, ……죽었다. -본문 중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고는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남에게만 일어나라는 법도 없다. 그렇다고 속으로 삭이고 눌러두며 사는 것이 맞는 것일까? 이것이 문제의식의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겪는 작은 소음과 진동에서 시작해 실체가 없는 상대에게서 느끼는 불편과 불통, 그로 인해 고통받는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는 것으로 문제는 더 커졌습니다.

80매짜리 단편 하나를 아주 오래 잡고 쓰면서 여기저기 헛딛고 허우적거렸습니다. 때로 울컥했고 때로 화가 났고 때로 속이 시원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이 모든 감정을 독자들에게 펼쳐 보이려 합니다. 허방에 빠지지 않게 조심하면서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휘는 죽은 듯 보이는 것들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보따리를 끌고 이 학교 저 시설을 헤매는 공예 강사 일을 집어치우고 휘의 꽃집에서 꽃다발을 만들었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져도 절대 허락할 수 없다는 아버지 때문에 혼인신고만 하고 살림을 합쳤다.

시댁은 특별자치시에서 H군 쪽으로 향하다가 강 하나를 건너면 만나는 정지용의 시에나 나올 법한 시골이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떠다니던 나는 휘를 만나 제대로 된 고향을 찾은 느낌이었다.

‘시’자 달린 건 다 싫은 게 며느리 아냐?

휘는 부러 수상쩍은 눈빛을 만들며 물었다. 나 또한 내가 몹시 수상했다. 면 소재지 끄트머리 집에 도로 쪽으로 난 나무 대문이며,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얕은 흙담, 오랜 세월 무수한 발자국이 다져놓은 마당과 길이 잘 든 대나무 평상, 짙은 그늘을 드리운 잘생긴 은행나무 한 쌍…… 시선 닿는 곳마다 휘의 흔적이 살뜰히도 묻어있었다. 휘가 이곳에 묻힌 뒤론 혼자 차를 몰고 내려왔다. 상담사가 권한대로 트라우마 치료를 위해 바람을 쐬러 나오면 어느새 이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휘는 개업 초부터 함께했던 민에게 꽃집을 넘기고 어머니가 심었던 꽃에 새 품종을 더해 농장을 일으키고 싶어 했다.

시골집도 고치고 하우스도 한두 동 더 늘리고 당신 작업실도 만들자. 내려가면 아이도 낳고. 삼 년만 참으면 돼.

2023년 오영수 신인문학상 당선

 

gemma07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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