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열꽃이 피는 이유
작가의 말
필리핀에서 부활절 주간에 열리는 ‘쿠투드 렌텐 의식’은 예수가 걸었던 고난의 길을 따라 걸으며 참회하는 축제입니다. 한 남자가 십자가에 못 박혀 결국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욕했습니다. 미개하다고. 그리고 며칠 뒤 피부에 발진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가려웠습니다.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정도로, 밤마다 잠을 설칠 정도로. 그러다 어느 순간, 그게 단지 피부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익숙한 환경에서 한 발만 벗어나도 사람은 한없이 약해집니다. 밥도, 위생도, 언어도, 체면도, 심지어 내가 옳다고 믿어왔던 감정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하나씩 무너지는 사이, 내 안에 숨어 있던 얼굴 하나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찌질하고, 좀 우습고, 그래도 조금은 솔직한.
그 얼굴을 마주한 뒤부터 가려움은 천천히 가라앉았습니다.
이 소설은 살면서 한 번쯤 누구나 겪게 되는 자기만의 열꽃에 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