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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이 있다고 믿으시나요?

박은비 20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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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내용 스포일러가 될 수 있습니다.*

 

 

<연기를 위한 연기를 위하여>라는 제목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되었다. 소설의 제목 자체도 의미심장하지만, 언젠가 영화 '해리포터'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다니엘 래드클리프가 인터뷰에서 "저는 ''마법사 역할을 맡은 연기자'를 연기하는 마법사'인 거죠."라고 장난스럽게 말했던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에. 이 소설도 그런 내용일까? 호기심을 붙들고 끝까지 읽고 나서 든 생각은, '태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었다.

 

서사의 큰 흐름은 이렇다. '나'와 외사촌동생 '희수'가, '나'의 후배이자 '희수'의 전 남자친구인 A를 만나러(설득하러) 가는 이야기. 작가의 말도 그렇고 서사의 내용도 그렇고, 읽다 보면 왠지 실제 이야기를 소설이란 이름으로 덧씌워놓은 건 아닐까 하는 미적지근한 의심이 든다. 소설을 읽고 내가 느꼈던 묘한 감정도 이 의심에서 기인한 것이긴 한데, 재독하면서 그건 사실 크게 개의치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읽을 땐 인물들이 가진 배경과 태도를 더 유심히 곱씹으면서 읽었다.

 

'희수'와 '나'는 3대째 절을 운영하는 불자 집안에서 태어났고, '희수'는 큰스님처럼 통찰력(이라고 해야 할까 예지 능력이라고 해야 할까...아무튼)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 통찰력은 '세상의 무수한 차원을 본다'고 표현되어 있다. 물론 '나'도 그런 능력이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나'는 큰스님의 예언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고향을 떠나 살지만, 결국은 큰스님이 예언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고 있고, '희수'는 '나'가 떠난 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삭발을 했고 출가를 앞두고 있다. 그리고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A와 헤어졌고, 아직도 자신에게 미련을 갖고 있는 A를 단념시키기 위해 '나'와 함께 A가 있는 곳으로 찾아간다. '나'는 '내가 본 무수한 차원 중 하나'가 벌어지지 않도록 A를 먼저 만나 설득해보겠다고 했고, 실제로 자신이 본 차원의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희수' 역시 '무수한 차원 중 하나'를 이미 봤고, 그것을 '연기'하기 위해 A에게 왔으니까. 그리고 완벽하게 연기하는 희수. 그렇게 A와의 이별은 갈무리가 된다.

 

이 소설의 전제는 '운명은 정해져 있다'는 것 같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모든 경우의 수가 있고, 어느 것을 '연기'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렸다' 라는 느낌이다. (불교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있다면 소설의 내용이 어렵지 않게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경우의 수'를 잘 '연기'하는 것이 '연기를 위한 연기'인 셈이 된다. 배역을 결정하고, 그 배역에 맞는 대사와 행위를 하는 것과 같은 느낌. 사실 삶을 대하는 태도가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굳이 독실한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일상 속에서 우리는 정해진 운명을 궁금해하기도 하지 않은가. 예컨대, '년월일시의 통계학'인 사주를 보며 나에게 맞는 삶이란 무엇인지 내 삶의 위기와 약점은 무엇인지 가늠해본다거나.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작가라서 '작가라는 운명에 대한 태도'가 담긴 문장들도 속속 등장한다. ('어차피 소설은 가짜니까' '개인사는 어려워서 안 쓴다. 남의 사연은 쉽다.' '내가 쓴 소설도 그저 주어진 거라면 선택은 한 가지, 연기를 위해 나의 배역을 연기하는 것뿐이다' -이건 작가의 말에 나온다) 읽으면서 공감 가는 문장들도 있어 몇 번 멈춰 곱씹으며 읽게 됐다.

 

운명이 있다고 믿는가? 나는 운명이 있다고 믿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없다고 단언하지도 못하겠다. 정해져 있는 거라면 좀 잘 '연기'하고 싶으니 단서라도 알고는 싶은데, 내 삶은 우연찮게 벌어지는 사고 투성이라 허둥지둥 하다가 지나가버리는 것 같고, 그렇게 헐레벌떡으로 쌓여가는 운명 가운데 서 있다. 나도 언젠가는 '희수'처럼, 내게 정해진 운명을 담담하게 연기할 수 있을까?

 

점점 추워지고 있다. 잠시 시간을 내어 운명에 대한 '세상의 무수한 차원'을 한 번 들여다본다던가, 나의 연기는 또 어떤 태도일 것인지 고민하며 사색하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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