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
이 소설을 읽고 난 첫인상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뛰어난 활자 직조력과 매력적인 이야기 전달력으로 독자에게 스펙타클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한다.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쥔 채로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행여 부족한 리뷰로 감상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에 관하여’ 개인적인 후감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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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트라우마는 아주 깊다. 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망각의 심해에 가라앉아 한때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교묘하게 파묻혀 사소한 흔적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끊임없는 진동과 파동을 일으키며, 한 개인 혹은 집단에 불가항력적인 파장을 일으킨다.
쉽사리 망각의 해저에 이를 수 없기에, 그 파장이 단순히 해수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서, 어쩌면 누군가는 무거운 산소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망각의 해저로 뛰어드는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소설 <물>은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소재로 다룬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인 나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과거에 내 룸메이트였던 사카미즈가 가지고 있던 해변 그림 포스터 뒷면에 적힌 문구를, 현재에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그 문구는 이러하다.
물은 진동한다.
소설 <물>에서 주인공 나는 사카미즈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달자로서의 역할만 한다. 철저한 거리 두기를 통해 관찰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말 없는 전달자인 내 기억의 파동을 타고, 이야기는 어느새 사카미즈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 인도네시아의 한 해안 지역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과거 기억으로부터 현재로 전환되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과거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내 기억이 재해석되는 과정을 겪으며, 그 과정에서 사카미즈의 이야기가 현재의 시간성 속으로 재소환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전환 과정을 통해, 독자는 어느샌가 에메랄드빛 넘실대는 인도네시아 해안가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물은 포스터 속의 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제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생명력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러한 물로 인해, 사카미즈를 비롯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서사는 최고조에 달한다. 서사뿐만 아니라, 바다에 대한 묘사가 실제 그 장면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현장감이 단연 압권이었다.
백상아리의 윗니야. 어떤가, 예쁘지?
상어 이빨 조각은 이 소설에서 물과 함께 중요한 소재이다. 이를 둘러싸고 죽은 이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자와 죽은 이를 망각하고 훼손하려는 자가 마치 대립 구도를 이루는 듯 사카미즈에게 갈등과 마찰을 일으킨다.
이후 사카미즈의 선택은 무엇일까……?
바다는…… 틈틈이 보아두어야 해.
결말에 이르러 사카미즈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사카미즈가 직접 바다와 대면하는 장면이었다. 쉽사리 언급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지점에 서게 되었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으며 감정 이입이 되어, 이토록 무심한 바다가 얄밉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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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물을 넘어 삶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인간의 의식이 다다를 수 없는, 깊은 심연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그것은 내 안에 내재된 심연으로 이어졌다. 가장 깊은 곳에 이르면 혹 사카미즈가 보았던 바다와 작은 상어 이빨을 발견할 수 있을까…… 두 눈을 크게 뜨고 틈틈이 보아 두어야 겠다.
좋은 작품을 만나게 해 준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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