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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는 건들지 마라: 2025 추천작

현진건문학상 단편

이성아 2025-11-04

ISBN 979-11-94803-49-2(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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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현진건문학상 추천작

갑작스런 사고로 딸은 죽었는데, 딸의 어린 시절 친구 연하가 내 앞에 나타난다. 아빠도 모르고 엄마마저 일찍 죽어서 늘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던 아이가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아 어엿한 가정을 이루었다. 어쩔 수 없이 죽은 딸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힌 나는 연하의 부부싸움조차 부럽다. 딸에게 했던 말들, 딸이 내게 했던 말들, 상처를 주는지도 모르고 함부로 했던 말들이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나는 책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딸보다 연하를 두둔했고 딸에게 연하가 불쌍하지도 않냐며 소리쳤었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연하에게 ‘엄마처럼 생각하라’고 했던 말을, 그러나 나는 기억조차 못 한다. 상투적인 위로는 오히려 연하에게 상처로 남았고 연하는 기다렸다는 듯 내게 되갚아준다. 연하를 볼 때마다 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나는, 연하를 ‘딸처럼 생각하며’ 아기를 돌봐주는 나 자신이 두려워진다.

윤리라는 가면을 쓴 행동과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말. 단지 어른이라는 이유로 함부로 재단하고 가르치려는 사람. 그 대상이 아이들일 때 그 속수무책의 폭력성에 대해 생각한다. 길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노라면 자꾸만 아이들이 겹쳐 보인다.

사고가 나던 날, 보미가 밤늦게 전화했다. 취한 목소리였고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았다.

“엄마, 어떤 말은 가슴에 대못처럼 박힌다고 하잖아. 그런데 못은 뺄 수라도 있지. 망치가 그렇잖아. 망치는 못을 박을 수도 있지만 반대편에는 빼는 것도 있잖아. 박으면 뺄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런데 말이 대못처럼 박히면 뺄 수가 없더라.”

오늘은 또 어떤 진상이 무슨 말을 했길래 이러나. 나는 휴대폰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로 굵은 빗줄기들이 마치 대못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섣부르다는 생각이 가로막았다.

“금방 갈게, 엄마.”

전화가 끊어졌을 때 나는 잠깐 후회했다. 빗줄기가 더욱 굵어졌다.

보미는 자라면서 말수가 적은 아이가 되었다. 어릴 땐 짜증을 잘 내고 질투와 어리광이 심해서 힘들었는데, 커서는 잘 참는 아이였다. 힘든 일이 있어도 다 지난 후에 한마디 하는 식이었다. 콜센터에 다니면서부터는 말이 더욱 줄었다. 그런 아이가 만나는 남자가 있다는 말을 슬쩍 흘렸다. 나는 부러 심드렁한 표정으로, “언제 보여줄 거야?” 물었고 보미는 “때가 되면.”하고는 입을 닫았다.

그게 다였다. 나는 궁금해도 꾹 참고 기다렸다. 장대비가 쏟아지던 그 날도 나는 무슨 말이든 했어야 했다. 집에 오면 보게 될 엄마에게 굳이 전화했을 때는 듣고 싶은 말이 있었을 거였다. 간절하게. 그것이 비록 섣부르고 공허한 말일지라도. 내 말문을 가로막은 건, 그 진상이 나 자신일지 모른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금방 갈게, 엄마”라고 말하기 전 잠깐의 침묵은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였다. 보미는 과속으로 달리던 차에 치여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시신을 보여주기를 꺼리던 의사가 나를 따로 불러서 말했다. 임신 중이었다고.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에 단편 「미오의 나라」로 작품활동 시작. 

장편소설 『밤이여 오라』, 『가마우지는 왜 바다로 갔을까』, 『경성을 쏘다』 

소설작품집 『태풍은 어디쯤 오고 있을까요』, 『절정』 등

제주4.3평화문학상, 세계일보문학상 우수상, 이태준문학상 수상. 

 

i-stella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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