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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수치: 2025 추천작

현진건문학상 단편

노정완 2025-11-04

ISBN 979-11-94803-47-8(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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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현진건문학상 추천작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짧은 동영상을 봤습니다. 가게 앞에 탈진한 까마귀가 있어서 먹이를 줬더니 다른 까마귀들도 매일 찾아온다더군요. 유리문 앞에 서너 마리 까마귀들이 날개를 펼치고 입을 벌린 채 드러누운 겁니다. 서로 좋은 자리 차지하려고 쫓고 쫓기면서도 탈진 연기를 하는 까마귀들을 보면서 저 또한 가게 주인에게 먹이를 구걸하는 까마귀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가게 앞에 쓰러진 까마귀는 유리문에 충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어떤 찬란함에 이끌렸는지 몰라도 주변을 살필 겨를이 없었겠지요. 왠지 그 까마귀가 소설을 살고 소설에 직진하는 소설가 같았습니다. 소설 밖에서 소설을 향해 엎드린 제가 돌아 보여서 수치스럽더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시늉으로나마 소설 언저리를 맴돌던 시간들을 관통해서 지금 여기에 도착했으니 제 몫의 찬란함이 두근두근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책 좋아하세요?

당황한 그녀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면서 점점 수그러든 목덜미가 꺾일 듯 땅만 내려다보는 그녀에게 그가 또 말을 걸었다.

잘해드릴 테니 한번 골라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다정하면서도 시원시원했다. 그녀는 제 앞에 멈춰선 깨끗한 운동화만 쳐다보았다. 운동화를 살짝 덮는 잘 다려진 바지와 반짝이는 버클까지 시선을 끌어 올리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돈이 없어요.

그가 그녀를 마주 보며 웃었다.

돈 주고 사는 사람 없어요. 다 월부로 하니까.

그래도……

그쪽한테는 백 년 월부라도 해드릴 수 있어요. 얼굴이 온통 벚꽃 색깔인데, 그렇게 부끄럼을 타는 사람이 돈 떼먹는 걸 저는 본 적이 없거든요.

그날 그는 단행본 한국소설 한 권을 그녀 손에 쥐어주었다.

1999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2002년 《21세기문학》 신인상 중편소설 『 떠도는 늪』 당선

2021년 소설집 『용들의 시간』, 『몽유』 

 

moonin7@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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