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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소설집

웹북 단행본 선택안함

구효서 2025-04-27

ISBN 979-11-94803-08-9(05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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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효서 소설집』은 동료 절친 소설가 박상우가 기획하고 발문까지 자청하여 쓴 컬래버레이션 소설집이다. 박상우는 2021년 인터넷 시대의 문학 환경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 ‘본격문학의 새로운 생태우주’를 표방한 웹북 전문 플랫폼 ‘스토리코스모스’를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국내 작가들의 소설을 웹북으로 만들기 위해 작품을 선별하는 과정에서 구효서의 소설 여섯 편에 각별한 애정을 느껴 이 소설집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책에 수록된 여섯 편의 소설을 통해 박상우는 30년 넘게 구효서를 친구로 만나온 세월보다 더 깊고 핍진하게 ‘인간 구효서’를 이해하고 ‘작가 구효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작품들이 모두 사랑을 다루고 그것의 어긋남을 다룬 것들이라 구효서 소설의 빼어난 절창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을 통해 인생을 말하는 구효서 대표작 선집의 탄생, 두 작가의 30년 교감이 만들어낸 소중한 결실이다.

책을 묶고 보니 거의가 사랑이야기였다는 건 이번에 새로 깨닫고 놀라게 된 사실이다. 더욱 소름 돋았던 것은 ‘오래 두고 사귄 가까운 벗’ 박상우 작가가 가려 뽑은 여섯 편의 소설이 모두 ‘가만히 찾아 읽는 작품들’에 든다는 것이었다.

그렇지, 누가 사랑을 알며 누가 사랑을 모를까. 그리고 그걸 안다고 내가 사랑을 할 줄 아는 것이며 그것을 모른다고 사랑이 내 안에서 영영 사라져 버리는 것일까.

소설보다 삶보다 먼저 저 사랑이 궁금하여 몸부림쳤던 기억의 흔적들이 문장 여기저기에 생생하다. 그 몸부림이 소설과 삶을 대할 때의 곤혹과 조금도 다른 것이 아닐진대 절친 작가 박상우가 어찌 그걸 모를 리 있겠는가.

조금은 늘 숙연하고 조금은 늘 안타까워지는 사랑이야기야말로 기억의 세포를 새로 일깨우는 데는 즉효인 것 같다. 다시 처음 앎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다주는 것, 게으름과 욕심 이전의 장소로 되짚어가게 하는 것, 아집과 오만이 해체되고 초발심의 새순이 돋는 지대로 인도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다.

그녀가 돌아간 적막한 오피스텔엔 그녀가 남기고 간 화장품 냄새와 산화한 애액 냄새가 추한 기억처럼 떠돌고 있었다. 그는 창문을 열고 오랫동안 환기를 시켰다. 그리고 유리잔에 꽂혀 있던 백합을 꺼내 창밖으로 던져 버렸다. 백합은 31층 저 아래로 아득히 떨어져 내렸다.

그에게는 잊으려고 해도 도무지 잊혀지지 않는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에겐 그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많은 사람 중에 하나였을지 모르나, 그에게는 그 여자가 전부였다. 전부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분명했던 것은 그 여자와의 섹스가 말할 수 없이 좋았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만이라고 말하고 말기엔 부족함이 너무 많은 것 같았다. 그는 그 여자의 음성이 좋았고 머리카락이 좋았고 맹장수술 자국이 좋았다. 다 좋았다. 좋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에게는 그 여자가 ‘여자’라는 것의 기준이 되었다. 다리통도 그녀와 다른 여자는 못나 보였고, 비슷하면 신기해 보였다. 걸음걸이며 엉덩이며 눈썹이며 턱까지도 그 여자와 닮거나 그 여자의 스타일에 가까워야 간신히 여자로서 인정되었다. 가슴도 안쪽이 아니라 바깥쪽으로, 그것도 호리병 모양새로 늘어진 듯 벌어져야 했고, 무엇보다 유두와 유륜은 아주 옅은 갈색이어야 했고, 엉덩이는 약간 납짝한 쪽이어야 했으며, 목소리는 저음이어야 했다.

그 여자를 만나는 동안 그는 애꿎은 여자들을, 그리고 불특정한 다수의 남자들을 측은하게 여겼다. 길에서나 전철에서나, 여자들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속으로 혀를 찼다. 저들도 애인이나 남편이 있을까? 있겠지. 왜 없겠어. 그래서 저들도 섹스라는 걸 하긴 하겠지. 저런 여자를 여자라고 안는 남자들이 정말로 불쌍해. 어떻게 저런 몸에 자기 몸을 포갤 수 있을까.

그는 그 여자가 자신의 여자라는 게 한없이 행복했고, 그 여자를 포함하고 있는 이 세상이 좋았고 고마웠다. 다른 여자가 아닌 그 여자 위에 자신의 몸을 얹을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그런 행운을 허락한 하늘에 감사했다. 전생에 분명 좋은 공덕을 쌓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가 좋아서 섹스가 좋은 건지 섹스가 좋아서 그 여자가 좋은 건지 그는 그게 늘 궁금했다. 세상에서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가 그거라고 생각했다. 그 여자의 몸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그는 계란이 먼저일까 닭이 먼저일까 하는 식으로 그 문제를 떠올렸다. 풀릴 까닭이 없었다. 다만 어느 것이 먼저든 그는 섹스와 그 여자 모두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러워했다. 그처럼 그 여자도 그러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 여자의 말과 표정들로 봐선, 그가 그 여자를 좋아하는 것처럼 그 여자도 그를 좋아하는 것으로 보였다.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그 여자도 그가 그러는 것처럼 그를 좋아하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그 여자에 대한 그의 사랑은 그러한 걱정과 불안과 안타까움들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 여자를 만나던 동안은 물론이고, 그 여자가 떠난 지금까지도, 그와 관련이 있든 없든 하여튼 그 여자 이외의 여자들은 그 여자로 인해 그로부터 여전히 손해를 보았다. 한마디로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니까. 거들떠보지도 않기는커녕 애꿎은 여자들마저 공연히 측은하게 여겼으니까. 만일 그 여자가 아니었다면 지금 거머리 같은 그녀의 주가도 대번에 상한가를 칠 것이 분명했다. 한마디로 그녀는 운이 없는 거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그에게서 떠나고 말았다.

1957년 강화도에서 태어나 1987년 『중앙일보』로 등단했다. 소설집 『확성기가 있었고 저격병이 있었다』 『깡통따개가 없는 마을』 『시계가 걸렸던 자리』 『저녁이 아름다운 집』 『별명의 달인』 『아닌 계절』 등과 장편소설 『늪을 건너는 법』 『라디오 라디오』 『비밀의 문』 『내 목련 한 그루』 『나가사키 파파』 『랩소디 인 베를린』 『동주』 『타락』 『새벽별이 이마에 닿을 때』 『옆에 앉아서 좀 울어도 돼요?』 등이 있으며, 산문집 『인생은 지나간다』 『인생은 깊어간다』 등을 펴냈다.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avocado1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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