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성범죄와 가족 공모 구조, 여성적 죄책감과 생존 감각을 환상적 장치와 결합해 고딕 호러의 형식으로 구현한 동시대적 심리소설. 피해자는 죽어도 사라지지 않는다.사진이 되고, 영상이 되고, 유령처럼 남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 유령을 평생 보며 살아간다. 피해자의 얼굴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시대에 대한 잔혹하고 아름다운 고딕 리포트.
소재를 어떻게 다루느냐, 보다 소재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 가 작가의 작품에 대한 태도를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소설을 쓸 때 무결하고 무해한 제 3자로서 누군가를 일벌백계하거나 함부로 침묵해 중립자의 위치에 서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단지 작품 속 인물들의 상황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나의 생각과 신념과 정제된 시선이 개입되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끝까지 쓴 것은 누군가에겐 이 이야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다소 오만한 용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늘도 어디선가 풍길 계피향을 어렴풋이 감각한다.
일주일 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읽은 인터넷 기사를 나는 기억해냈다. 유수의 신인감독상을 받은 젊은 감독이 지하철에서 불법촬영범으로 붙잡혔다 풀려났다고. 그 감독이 누구인지, 이름은 물론이고 성별조차 밝히지 않은 기사였다. 그럼에도 댓글란은 이미 확정적으로 누군가를 초성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나는 그 초성을 따라 추측하다 얼떨결에 오빠의 이름을 찾아냈다. 뒤이어 그로부터 얼마 전 영화제 시상식에서 상을 탄 오빠의 사진을 찍어주고 꽃다발까지 건넨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오빠의 SNS 계정으로 들어가보았다. 가장 최근에 업로드된 게시물이 하루 전 거였다. 동료 배우, 감독들과 함께 호프집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거기에 달린 댓글들을 나는 찬찬히 살펴보았다. 정말 이 감독님이 현장에서 붙잡힌 불법촬영범이 맞냐고 비꼬듯 묻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어지러웠다. 누군가 둔기로 강하게 머리를 내려친 듯 한순간 사리 분별이 되지 않았다. 나는 하룻밤 친구네에서 자고 온다던 오빠의 말을 떠올리며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의 통화연결음 끝에 그의 목소리가 스피커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빠.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 빨리.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
웹북 『사물연습』『것』『퀴어문학은 취급하지 않습니다』『이이』 『공』 『무연고 휴가』『로보, 나를 물어줘』 『비를 사랑하는 감각에 대하여』 『조안 킹 선서』『나오미를 찾아서』 『당신의 공중부양』 『풍선 키우기』『자몽 투쟁기』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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