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이후의 노동 감각, 관계의 거리 조절, 고독한 생존 윤리를 매우 미세한 감각으로 포착한 소설. 연결보다 ‘거리’를 통해 관계를 말하고, 사건보다 ‘리듬’을 통해 인물의 존재 상태를 드러내고, 반복 행위를 통해 존재를 유지하는 21세기적 인간형, 감정 설명을 최소화하고 동작과 사물 배치만으로 정서를 전달하는 미니멀리즘적 기술 방식이 압권이다. 거대한 사건 대신 반복되는 생활의 결을 통해 인간 존재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의 또다른 방향성을 보여주는 새로운 작품.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상의 시스템에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자기 삶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와도 너무 가까워지지 않고 적정 거리를 유지하며 지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그러나 새로운 계절이 오고 또 지나가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으며,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한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 그것을 따라가면서 인물을 그렸습니다.
다음으로 한 정거장 떨어진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정미는 문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들릴 듯 말 듯 두 번 노크했다. 곧바로 세진이 문을 열었고 정미는 안으로 들어갔다. 세진이 그녀의 가방을 받아 들고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정미는 2인용 식탁 위에 놓인 반찬통을 가리키면서 오늘은 코다리찜이에요, 했다. 세진은 늘 그 자리에서 한 번 뚜껑을 열었다. 와, 맛있겠다.라고 말하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거실 조명은 책상 위를 밝게 비추는 스탠드의 불빛이 유일했다. 세진은 오늘 일찍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고 아쉬워하면서 정수기에서 물을 따라 정미에게 건넸다. 정미는 물컵을 받아 들고 책상 쪽으로 다가갔다. 도면 위에 자와 필기구가 놓여 있었고 지우개 가루들이 흩어져 있었다.
“시험이 얼마 안 남았어요.”
세진이 정미의 허리에 살며시 손을 올리며 말했다. 책상 옆 바닥에는 책들이 책상 높이만큼 높게 쌓여 있었다. 같은 제목으로 보이는 여러 판본이 두세 권씩 함께 보였다. 정미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정미는 세진의 손 위에 자기 손을 겹쳐 잡고 설계 도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건물의 출입구를 따라 가운데에 마당 같은 자리가 있었다. 마당이 있는 곳에 작은 동그라미들도 여럿 그려져 있었다.
“이건 뭐예요?”
잠시 후에 정미는 머리를 매만지며 세진의 침실에서 나와 식탁으로 향했다. 세진이 따라 나와 정미를 위해 냉장고 문을 열어주었다. 정미는 비어 있는 냉장고 자리에 통 세 개를 차례로 넣었다. 일어나서 세진을 한번 안았다. 그리고 보냉백을 들고 신발을 신었다. 그가 문 앞까지 따라 나왔다.
총 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