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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 20분에 방영하는 9시 뉴스: 2023 추천작

현진건문학상 단편

이준호 2025-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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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현진건문학상 추천작

산 자와 죽은 자는 각자의 집에서 산다. 모양과 크기가 다를 뿐 그 기능은 같다. 우리가 때가 되면 귀가하듯 그들도 죽어서 집을 찾아간 것뿐이다. 언제부턴가 둘의 영역을 구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집 근처에 군경합동묘지가 있다. 바로 그 옆으로는 모텔촌과 주점이 밀집해 있다. 어두워지면 한쪽에선 네온과 음악이 요란하다. 다른 쪽은 무거운 침묵과 깊은 어둠에 빠진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그렇게 공존한다.

너무 늦은 깨달음은 없다. 너무 이른 깨달음도 없다. 모든 깨달음은 적당한 때에 우리를 찾아온다. 깨달음은 공평하다. 과분한 깨달음도, 보잘것없는 깨달음도 없다. 원효대사의 해골 물 같은 대각은 우리에게 필요치 않다. 자잘하고 소박한 깨달음만으로도 우리 삶은 충분히 유지된다.

내가 일러준 대로 상주가 삽으로 흙을 세 번 떠 넣는다. 이어서 한 명씩 나와 두 손으로 한지 위에 모아둔 흙을 떠서 흩뿌린다. 흰 머리 때문에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상주가 광중을 덮은 흙에서 돌과 삭정이를 골라낸다. 망자의 부인, 그러니까 상주의 모친이 박 교수라 부르는 걸 들었다. 찬찬히 보니 콧날이 오뚝하고 입매가 야무지다. 반듯한 이마와, 고집스러우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은 그가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임을 말해준다. 남들에겐 나이 들어 보이게 하는 흰 머리가 그에겐 이지적인 외모를 강조하는 아이템 같다.

한때는 나도 인생의 목표가 박 교수와 같았다. 어머니가 겸임교수인 나를 윤 교수라고 부르는 목소리엔 대견함과 뿌듯함이 묻어났다. 전임이 되기 전엔 교수가 아니라고 해도 어머니는 명칭을 바꾸지 않았다.

아내의 장례가 끝났을 때 내 꿈도 끝장나 있었다. 상장을 달고 학교에 갔다. 나는 바람을 피워 아내를 자살로 몰고 간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다. 술자리 같은 데서 자기 후임은 나라고 공공연히 말했던 지도교수는 나를 피했다. 복도나 식당에서 마주친 선후배들은 노골적인 경멸과 혐오의 눈길을 보내왔다. 경쟁자였던 강 선배와 그의 추종 세력이 만들어낸 소문이었다. 그는 나와 같은 현대소설 전공이지만 소설 공모전에서 두어 번 예심을 통과한 적도 있었다. 작가 지망생답게 그가 지어낸 스토리텔링은 완성도가 꽤 높았다.

내가 손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비열하고 저열한 짓이었으나 멘탈을 잡아야 했다. 방법이 잘못되었지만 내가 최선을 다했듯 그도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해명해도, 하지 않아도 결과가 같다면 침묵만이 유일한 방어책이자 해결책이었다. 서류 전형을 통과하고 강의 시연을 했다. 면접까지는 가지 못했다. 예상했던 결과였다. 강 선배도 탈락했다. 유력 후보군은 다 떨어졌고 타 학교 출신이 합격했다.

1994년에 《작가세계》로 등단. 

2001년 MBC 창작동화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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