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라이브러리

+

수상작

  • 단편 당선작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물: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이범기
  • 단편 당선작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두 번째 탄생: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성호
  • 단편 당선작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205동 1201호: 2025-1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김상현
  • 단편 당선작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토마스 농장: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주한나
  • 단편 당선작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숲: 2024-4 스토리코스모스 신인소설상 당선작 박호연
  • 단편 수상작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팔월극장: 2024 현진건문학상 수상작 김설원
  • 단편 당선작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위시리스트 담기 자세히보기
    스며드는 것들: 2024 현진건신인문학상 당선작 금이정

+

기획 분재

+

웹북 단행본

+

열편시집

+

에세이

+

리뷰

몸으로 하는 사랑을 위하여   '러브체어'는 해석하자면 '사랑을 위한 의자'다. 하지만, 섹스를 위해 고안된 의자니까, 일차원적으로 사랑을 섹스로 혹은 섹스를 사랑으로 말하기는 쉽지않다. 하지만 그건 지금 얘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러브체를 읽으면서 사랑에 대한 혹은 예술을 향한 열정에 대한 소설로 읽었다. 즉, 인간의 고귀한 열망.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일까? 그런 질문을 해보면, 몸으로 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을까 싶다. 심지어 사람과 사람이 하는 건데. 이 작품은, 영화감독인 주인공이 시나리오가 잘 되지 않아서 J와 그의 여자 친구와 함께 대화하는 형식으로 시작한다. 화자의 이야기를 듣는 둘은 별 반응이 없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중학생 시절 ‘러브체어’라는 단어가 적힌 시골 장면을 떠올린다. 거기에서 우리들의 추억이 소환된다. 그 당시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거의 다 구경했을 그 플래카드. 얼마나 생소하고 생뚱맞은가. 나도 봤다. 나는 방성식 작가의 이런 위트에 감동했다. 주인공은 그 이후, ‘러브체어’에 대한 환상이 생겼고, 심지어 지금은 그걸 만든 회사까지 찾아간다. 물론, 출시 후, 5년 즈음 됐을 때, 폐기?되었지만, 섹스와 러브체어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나는 ‘러브체어를 찾아서’를 읽으면서 웃다가 심각해졌다. 주인공이 꿈꾸는 것은 예술 영화다. 하지만, 시나리오를 전혀 못 쓰고 있다. 영화만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심난해졌다. 우리는 무언가를 원하지만,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다. 그래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설령, 그것이 별 호응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야기 해본다. 그러다 보면, 의외로 좋은 결과물을 가져올 수도 있으니까. ‘러브체어를 찾아서’ 는 그런 면에서 성공적이라고 본다. 작품에서도 그렇지만, 이렇게 소설로 완성되었고 아마, 주인공은 J커플의 체험을 통해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변화를 겪으면, 내가 숨 쉬던 곳의 공기가 달라지듯이, 그가 입에 문 담배 맛이 달라졌으므로. 몸이 바뀌었을까? 확실히, 사랑은 몸으로 하는 것인 모양이다.  ​ 혜섬
물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 물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 이 소설을 읽고 난 첫인상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뛰어난 활자 직조력과 매력적인 이야기 전달력으로 독자에게 스펙타클한 감동과 재미를 선사한다.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쥔 채로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행여 부족한 리뷰로 감상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의 기억, 그리고 트라우마에 관하여’ 개인적인 후감을 몇 자 적어보려 한다.  * 어떤 트라우마는 아주 깊다. 깊은 정도가 아니라, 그것은 망각의 심해에 가라앉아 한때 그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교묘하게 파묻혀 사소한 흔적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 끊임없는 진동과 파동을 일으키며, 한 개인 혹은 집단에 불가항력적인 파장을 일으킨다.  쉽사리 망각의 해저에 이를 수 없기에, 그 파장이 단순히 해수면 위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착각을 하기 쉽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알기 위해서, 어쩌면 누군가는 무거운 산소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망각의 해저로 뛰어드는 수고로움을 감당해야 할지 모른다. 소설 <물>은 물에 대한 트라우마를 소재로 다룬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공인 나의 기억으로부터 비롯된다. 과거에 내 룸메이트였던 사카미즈가 가지고 있던 해변 그림 포스터 뒷면에 적힌 문구를, 현재에 새롭게 발견한 것이다. 그 문구는 이러하다. 물은 진동한다.  소설 <물>에서 주인공 나는 사카미즈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전달자로서의 역할만 한다. 철저한 거리 두기를 통해 관찰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말 없는 전달자인 내 기억의 파동을 타고, 이야기는 어느새 사카미즈의 삶 속으로 흘러들어 인도네시아의 한 해안 지역에까지 이른다.  이처럼, 과거 기억으로부터 현재로 전환되는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다. 과거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사실이 새롭게 밝혀지면서, 내 기억이 재해석되는 과정을 겪으며, 그 과정에서 사카미즈의 이야기가 현재의 시간성 속으로 재소환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연스러운 전환 과정을 통해, 독자는 어느샌가 에메랄드빛 넘실대는 인도네시아 해안가에 당도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물은 포스터 속의 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실제 살아 움직이는 동적인 생명력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그러한 물로 인해, 사카미즈를 비롯 그곳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에 크고 작은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서사는 최고조에 달한다. 서사뿐만 아니라, 바다에 대한 묘사가 실제 그 장면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현장감이 단연 압권이었다. 백상아리의 윗니야. 어떤가, 예쁘지? 상어 이빨 조각은 이 소설에서 물과 함께 중요한 소재이다. 이를 둘러싸고 죽은 이를 기억하고 지키려는 자와 죽은 이를 망각하고 훼손하려는 자가 마치 대립 구도를 이루는 듯 사카미즈에게 갈등과 마찰을 일으킨다.  이후 사카미즈의 선택은 무엇일까……?바다는…… 틈틈이 보아두어야 해.  결말에 이르러 사카미즈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이 소설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사카미즈가 직접 바다와 대면하는 장면이었다. 쉽사리 언급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지점에 서게 되었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졌으며 감정 이입이 되어, 이토록 무심한 바다가 얄밉기까지 했다.  * 이 소설은 물을 넘어 삶에 대한 보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인간의 의식이 다다를 수 없는, 깊은 심연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그것은 내 안에 내재된 심연으로 이어졌다. 가장 깊은 곳에 이르면 혹 사카미즈가 보았던 바다와 작은 상어 이빨을 발견할 수 있을까…… 두 눈을 크게 뜨고 틈틈이 보아 두어야 겠다.  좋은 작품을 만나게 해 준 작가님께 감사드린다.  이시경
두 번째 탄생으로 주인공이 이른 곳   도입부터 좋았다. ‘도’가 죽었지만, 입속의 알들은 흩어지고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아들이 죽어도 살아가고 먹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 어떤 죽음은 달콤하다.   소설가를 꿈꿨던 아들이 썼던가, 하고 주인공은 문장을 떠올린다.   동태알은 고소하고 달달하다. 그것을 느낀 주인공은 무의식중에 죄책감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아들이 쓴 문장을 떠올린다. 동태의 죽음이 인간의 미각에 달콤함을 주어서 떠오른 문장 같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죽은 아들을 한시라도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주인공의 상태를 보여준다. 자식을 떠나보낸 부모는 뭘 해도 아들을 생각하게 되는 거다.    남편 황석은 그래서 대장암 3기인데, 굳건하게 임신했다고 믿는다. 그리고 남편은 이렇게 말한다.  도가 나한테서 다시 태어나려나 봐.  아들을 잃은 슬품과 그리움이 임신한 남편으로 잘 형상화 되어있고, 어떤 뻔한 말 없이 독자는 서사로 그 감정을 전달 받을 수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몰입해서 읽었다. 남편이 말하는 것은 진실일까 싶어서. 읽고 다들 확인해 보면 좋겠다.    개인적으로는 결말이 특히 좋았다. 그 울음은. 언젠가 있었고, 진짜로 주인공의 귀에 들리는지도, 주인공이 내는 소리일지도. 결말까지 독자를 사로잡은 소설은 끝까지 실망하게 하는 법이 없었다. 왜 이 작품이 당선되었는지 알겠다.   결말에서 느낀 환상성은 본질에 닿았다고 믿는다. 읽으실 분들을 위하여 다 밝힐 수 없지만, 주인공에게 거듭된 고통이 어떤 지점에 이르렀는지 다른 분들과도 공유하고 싶다. 김유
사랑도 조립할 수 있을까 소설가는, 언어를 통해 영감의 바다로부터 전혀 새롭고 낯선 이야기를 건져 올린다. 낯설고 새롭다는 것의 의미는, 인류 공통의 의식을 기반으로 하되,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유일무이한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떤 이야기를 낚아 올릴 것인가. 이 문제는 작가만의 스타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박은비 작가의 조립 가족을 통해 낯설고 새로운 스타일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바야흐로 가족의 형태가 급변하는 시대이다. 경제적, 사회문화적, 그리고 정책적 요인 등으로 인해, 과거 대가족이 주를 이루던 시대로부터 핵가족 시대에 이르러, 1인 가구의 형태까지 나타났다. 그뿐만 아니라, 로봇이라는 예상치 못한 존재가 우리의 일상까지 넘보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후 우리의 가족 형태는 어떤 모습으로 변모할까.  위 질문과 관련하여, 다시 작가의 스타일로 돌아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의미 있게 와 닿은 지점은 다음과 같다.  (박은비 작가 님의 소설은 매작품마다 독자에게 재미와 의미를 주며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주기에,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는 덤으로 가져간다.)ᅠ그것은 바로 조립 가족이라는 말에서 그 해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는 누구도 사용한 적 없는, 이 세상에 단 하나만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단어이다.  신기하게도, 조립 가족이라는 하나의 단어에 마치 앞으로 우리 사회에 만연할 가족의 형태를 보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반려로봇과 AI가 만연한 시대에, 우리의 의식은 조립 가족이 보여주는 일상에, 이미 진입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립 가족에서 젊은 부부가 로봇 아이를 대하는 모습은 진짜 인간 아이를 다루는 것과 동일하다. 그들은 로봇 아이에게 시간과 정성을 들이며 그만큼 '사랑'에 가까워지게 된다. 흥미로운 지점은, 로봇 아이를 흙에 묻는 장면이었다. 기술 진화의 정점에서 '흙'이 주는 의미란 무엇일까. 조립 가족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으로 조립된 가족이 아니다. 오히려 파편화된 사랑을 통해, 가족에 내재하는 사랑의 원형에 대해 말해준다. 누구나 자식을 키우면서 겪을 법한 대내적 상황이 자연스럽게 기술된다. 그로 인해, '우리'는 한 가족이라는, 가족 사랑의 연대감을, 파편화된 조립 가족의 형태를 역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낚시를 안 해 봐서 잘은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소설을 쓴다는 행위가 언어(言語)를 낚는 행위와 유사하다면, 이처럼 유일무이한 언어(言魚)인 '조립 가족'을 낚고 잘 가공하여 독자의 식탁에 올려준, 작가의 독창성에 감사를 보낸다.  솔트
누구세요?   인환은 식사 메뉴 쇼핑 리스트를 들고 마트 계산대에 서 있었다. 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아내인 아영이 재료 목록을 다시 보낼테니 메뉴를 바꾸자는 내용이었다. 그는 아내의 변덕에 지쳤다. 처가의 멸시와 아내의 허영을 참는다 하더라도 초단위로 널뛰는 아내의 기분은 지겨운지 오래다. 현관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주지 않아, 건전지 빼놓은거 모르냐는 둥, 다시 누르니 작동이 되는 둥, 헤프닝이 일어난다. 아이가 경수네 갔다고 하는 말에, 처음 듣는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정안은 둘의 과거 음악을 같이 한, 아영이 정안의 중요한 연주회를 망친 아픈 과거가 있는 사람. 그들의 관계는 끝났고, 정안은 독일로 유학. 정안이 이미 집에 와 있고 인환은 어리둥절하다. 부주싸움을 하러 둘이 안방으로 들어가고 아영의 전화가 울린다. 경수맘이란 전화를 받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한다. 문을 열자, 아이를 데리고 온 여자가 엄마와 아빠를 다 닮았다고 한다. 등 뒤로 인환이 다가오고 문 밖의 여자가 누구세요? 하고 묻는다.   초대는 서사에 밀도감이 엄청나다. 이야기가 계속 물고 이어지면서, 그들이 현재 왜 이런지 알게된다. 그 안에 말 못할 사정들이 담겨있다. 치밀한 계획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고 또한, 남자 인환의 심리가 잘 드러난다. 섬세하고 불안한 그의 시선을 따라가면, 아내와 정안의 사연이 드러난다. 말 못한 사정들이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지만, 말 못함으로 가라앉아 있는 것들이 보인다. 세사람의 인생이 그대로 비춰지는 듯 하다.  또한, 마지막에 부재중 전화가 네 번이나 찍혀 있어 어쩔 수 없이 받은 전화로, 현관을 열어 주었을 때, 문 밖의 타인이 오해를 하고 오히려, 아이 아빠인 인환에게 누구냐고 하는 장면은 소름이 돋는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모두. 이 소설의 백미다. 꼭 읽어 보길 추천한다. 혜섬
아이처럼 자꾸만 지껄이고 싶었다     모든 부모는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란다. 아니, 인간이라면, 모든 생명이 살아나기를 바란다는 의미다.   도영은 이 부부에게 온 아이다. 도입부에서 무슨 테러 이야기인가 했다. 그런 장치들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전자기기와 심장이란 단어에서 "생명에 관한 이야기"라고 상상했다. '우리 도영이'라는 표현으로 부부의 아이구나, 짐작했고.   하지만, 처음부터, 전자 기기에 문제가 생겼음을 알 수 있다. 프로그램, 초기화, 백업 데이터, 복구, 라는 등의 단어로 추측할 수 있었다.   "우리 도영이는 죽는 거예요?" 라는 위트있는 대화에서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키드노이드 로봇 아이임을 알 수 있었다.   "보시기 힘드시면 밖에 나가 계세요." 라는 대화에서 일종의 전복 혹은 동일시 하는 사물에대한 인격화를 느낄 수 있었다.   부부가 처음 조립을 하는 장면과 아이에게 작명을 하는 부분에서 진짜 자신이 낳은 아이 같이 하는 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도영이 부부를 관찰함으로써 학습을 해나가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마지막, "자꾸만 떠들고 싶었다." 는 진술에서 아버지의 임종 직전에 나도 그랬다.   생명을 살리고 싶어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말하고 싶으니까. 죽지 말라고, 살아나라고.혜섬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내가 있는 곳은 예비공간 나는 지난 몇 년간 히키코모리였다. 병원을 가거나 남자친구를 만날 때를 제외하고는 일절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최선을 다했던 직장생활에서 처참한 적응 실패를 겪었고, 그 충격은 실직으로 이어졌다.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채 방에 갇혔다. 방 밖으로 나가고 싶었지만 나갈 수가 없었다. 어거지로 방 밖으로 나가도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사로잡혀 진정제를 입에 털어넣고 심호흡하기 일쑤였다. 처음에 엄마 아빠는 나를 한심스럽게 생각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이러다가 죽을까 봐 매일 방문을 열어 내 생사를 확인하셨다. 죽은 듯이 자고 있으면 코에 검지 손가락을 가만히 올려보시기도 했다. 정말이지 암울한 시절이었다.  방에 갇힌 채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SNS였다. 나는 주변인들의 SNS를 염탐하며 열등감을 채워나갔다. 동창들은 저마다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결혼을 한 친구도 있었고 승진을 한 친구도 있었다. 내 자리는 이 곳, 고작 몇 평 남짓한 작은 내 방 안. 이 소설 속 주인공은 공격적으로 좋아요를 눌렀다면, 나는 좋아요를 절대로 누르지 않았다. 스크롤, 스크롤, 내 밑바닥을 향해 하루종일 스크롤을 내릴 뿐. 점점 밀폐된 곳으로 나는 내몰리고 있었다. 숨을 쉬기 어려운 나날들이었다.   그런 내가 히키코모리 생활을 청산한 것은 크게 두 가지였다. 가상의 회사생활을 하는 청년모임활동과, 남자친구의 아르바이트 청탁이었다. 가짜 회사생활 놀이나 간단한 아르바이트조차 할 힘이 없을 정도로 나는 망가져 있었지만, 다만 내가 가장 간절했던 것은 하나였다.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가상의 출근을 하고, SNS에 출근도장을 찍고, 오늘 하루 무언가를 주절주절 끄적였던 '업무 증빙'을 하고, 가상의 퇴근을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댓글을 달아 칭찬해준다. 간단한 규칙이었다. 그 규칙을 3달 동안 지키면 되었다. 처음에는 '이딴 게 무슨 소용이지?'라고 생각했지만, 분명히 나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용기가 생겼다. 남자친구가 부탁한 아르바이트를 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며 비난할 것 같다는 불안과 공포는, 따뜻한 햇볕과 부드러운 초여름의 선선한 바람에 사그라져버렸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긴장해서 손을 떨고 말을 더듬었지만 끝까지 해냈다. 생각보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 나는 SNS를 자주 하지는 않게 됐다. 주변인들을 염탐하는 일도 없어졌다.    소설을 읽는 동안 그 시절이 떠올랐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어떻게 나왔는지. 내 예비공간은 어떤 곳이었는지. 소설 속의 예비공간의 벽은 무너져내렸다. 주인공이 준비되지 않은 타이밍에 그런 사고가 발생해서 애석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준비가 되어도 힘든 '탈출'을 강제적으로 하게 되었다니. 그런 마음으로 이입하며 읽자 소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오늘날, 나처럼 어딘가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많다고 느낀다. 그 사람들은 갈 곳이 없어서 갇혀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든 갈 곳이 필요해. 주인공에게는 그게 예비공간이었던 것이리라.   언젠가, 준비가 되면, 스스로 '탈출'할 수 있는 것이 예비공간의 본질이기를 바란다는 생각을 하며 독서를 마친다. 단정하면서도 정확한 문장으로, 예비공간으로 향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잘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가 작품을 완전히 오독한 것일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나는 이런 오독도 꽤 괜찮다고 제멋대로 생각해보려 한다.     박은비
[단독] 그레고르 잠자가 외계인?! ⋯ 변신 예비된 현대인들 대충격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전지적 ‘실직 경험자’ 시점으로 작성한 리뷰임을 먼저 밝혀 둡니다. 소설을 얼마간 오독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그 오독 덕에 이 작품을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의미는 모르지만 용케도 영어로 된 노랫말을 다 외우는 어느 팝송 리스너처럼요. 「예비공간」을 읽으며 오래전 제 실직 경험을 떠올렸습니다. 재취업 기간 동안 외출도 잘 안 하고 방에서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했었습니다. 그때 『변신』을 다시 봤습니다. 고등학생 때 ‘세계 명작 필독서’라는 이유로 어거지로 완독한 이후 첫 재독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고 출근 준비를 하려는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벌레’로 변해 있다, 그래서 자기 방 안에 갇혀 버린다, 동거하는 식구들이 문자 그대로 그를 ‘벌레 취급’ 한다는 설정. 세계 명작 필독서라서 억지로 읽었던 시점엔 느끼지 못했던 압도적 몰입감에 책을 쥔 양손이 후들거렸습니다. ‘이거 내 얘기네?’ 재취업에 고전 중인 실직자. 이 사회에 아무 쓰임이 없는 무직, 무소득. 하루아침에 사람에서 벌레로 변해 버린 존재.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 #세계명작 #필독서 #카프카 같은 해시태그를 다 걷어내고 오로지 ‘이야기’ 자체에 완전히 몰두한 읽기 체험. 실직 후 정독한 『변신』​은 제게 큰 위로였습니다.(역시나 카프카 본인도 직장 생활을 하며 소설을 썼다고 하지요.) 「예비공간」의 ‘예비공간’이 그 시절 저의 작은 방, 벌레가 된 그레고르 잠자가 오도 가도 못하는 방과 겹쳐 보였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예비공간」 속 주인공이 인스타그램 중독자라는 점입니다. 이 소설은 예비공간 이용자들—실직자(전직 방송국 PD), 게임 중독자, SNS 중독자—을 “외계인”으로, 그들과 정확히 대비되는 자들—멀쩡히 경제 활동 잘 해 나가는 이들—을 “현대인”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외계인 눈으로 보면 현대인들도 외계인일 테지요. “상단에 나열된 스토리들, 화려한 띠 둘러쳐진 개개인의 행성을 검지 하나로 탐사하겠다.”는 서술로 짐작할 수 있듯, 주인공에게는 인스타그램 속 “프라하의 전경, 파인다이닝 코스, 주식 수익 인증, 갈아치운 애인과 네 컷 포토부스 사진들⋯⋯” 등속이 전부 외계/이계의 삶입니다. “불행이 거세된 외계에 친히 좋아요를 하나하나 눌러주겠다.” 지구를 정복하러 온 외계인처럼, 주인공은 자신이 갖지 못한 현대인/지구인의 삶-이미지마다 ‘하트’ 공격을 가합니다. 마치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그 삶들을 모조리 취할 수 있다는 듯이. 이런 손장난은, 소설 속 방송국 PD의 페이크 다큐멘터리와 같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리얼을 표방한 페이크’. 이를 소설은 대단히 시각적인 연출로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킵니다. “필터가 적용된 류는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였기에, (⋯) 내버려 두었다. (⋯) 아이폰을 내렸다. 거기엔 그냥 류가 있었다. 도로 올리자 류는 단번에 괜찮은 류가 되었다. 괜찮은 류에게 좋아요를 누르기 위해 그의 이마를 연달아 두 번 찔렀다.” 그렇습니다. 가상의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나 먹히는 ‘손가락 하트 공격’ 따위, 현실에선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입니다. “필터가 적용된 (⋯) 꽤 괜찮은 사람 같아 보”이는 그야말로 ‘사람다운 모습’을 ‘공유’해 오는 데 실패한 주인공. 이러나 저러나 무직, 무소득의 외계인일 뿐입니다. ‘이거 내 얘기네?’하는 생각이 또 불쑥 생겨 버리면서 순식간에 「예비공간」을 읽었습니다. 일부 게으른 기자들이 쏟아내는 ‘팩트 노체크’ 기사들과 제목 낚시, 유튜브의 과다한 ‘어그로’ 콘텐츠와 섬네일, 인스타그램의 각종 ‘자의식 과잉’ 게시물들이 전부 「예비공간」이 이른 ‘필터’와 ‘리얼 표방 페이크’의 사례 아닌가 싶습니다.  올해가 제2의 IMF가 될 것이라는 경제 전문가들의 전망을 자주 접합니다.(부디 리얼이 아니라 페이크이기를 바랍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현대인들은 모두 ‘변신이 예비된’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상대적 박탈감 유발’ 이미지들을 경계해야겠다는 각성을 문득 해 봅니다. ‘저렇게 살아야 사람다운 건가, 저렇게 안 살면 난 벌레인가.’ 하는 자격지심에 빠지지 않도록 마음을 다잡아야겠습니다. 소설 속 예비공간에 제 발로 들어가지 않도록, 그러니까 스스로 만든 마음의 밀실에 갇히지 말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예비공간」을 통해 제 실직 경험과 그레고르 잠자의 신세를 떠올렸고, 그러다 보니 영화 ⟨맨 인 블랙⟩에 나오는 바퀴벌레 외계인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요새 인스타그램에서 유행하는 짤 중에, 고전 소설 제목을 웹소설 느낌으로 바꾼 게 있더군요. 가령 『인간 실격』은 ‘재벌집 폐급 아들’, 『파우스트』는 ‘​S급 악마에게 집착당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입니다. ‘그레고르 잠자가 외계인이었다는 썰 푼다’ 「예비공간」의 제목을 이렇게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하며 혼자 피식했습니다. 최악의 구직난, 실업 대란이라는 요즘. 저를 비롯한 모든 분들의 일상에 필터링 없이 순수 지구인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날이 도래하길 바랍니다. 아무도 외계인으로 변신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임재훈
비어 있음이 쏟아져 내려, 어느 존재로 완성되었다 되도록 배제했으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마, 킴>은 실존적 주제에, ‘나’의 이야기로 일인칭 시점을 채택했음에도, 독자로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자의식이 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여러 ‘너’를 통해 나에게 가닿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무척 댄디한 도구들과 특색 있는 인물들을 징검다리 삼아.‘나’란 존재는 어떻게 발산하는가, 내뿜는가. 주인공은 아무 결론도 내리지 못했다. 결혼, 직업, 남녀, 부모, 문화, 유교, 위계질서 등 여러 사회적 제도가, 주인공 김가영에게는 그저 이상했다. 비문증과도 같은 의아감으로. 허나 그런 의아감이 그녀의 삶에 커다란 비중이 있지는 않았다.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일 터이다. 모르고 지나친다면, 딱히 신경 쓰일 정도는 아닌 그런 느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수긍한 채 살아간다.김가영에게 그런 ‘이상함’은 두 번 선명해진다. ‘김가영’이라는 같은 이름의 두 사람을 만난 일이다. 주인공 김가영은 청소년기에 만난 ‘김가영’에게 크게 동요했다. 반발심, 그리고 열정이었다.허나 설마흔에는 달랐다. 무신경과 허무. ‘나’는 유일무이하지 못하고, 그것은 온당하다 생각하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 ‘이상함’이 두 번째 김가영의 ‘사라짐’으로 다르게 선명해진다. ‘비어 있음’에 대한 감각. 주인공 가영은 그것을 ‘공물감’이라 칭한다.그녀는 뭐가 이상했을까. 의아했을까. 독자로서 추측해 보건대, ‘타인과 제도만으로의 증명’이 아니었을까 싶다. 주인공 김가영은 삶으로 꾸준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왔다. 허나 그것은 ‘번역사’라는 그녀의 직업과 마찬가지로, 주관을 최대한 배제한 타인과 제도를 통해서였다. 남으로 내가 서고, 남으로 내가 행위하고, 남으로 내가 생각하고. ‘나’는 비어 있던 것이다. 그런 비어 있음이 두 번째 맨땅의 헤딩 김가영의 사라짐으로, 이물감에서 공물감으로 진화했다고 해석해 본다.타인으로 완성되는 삶, ‘나’가 비어 있는 삶, 때문에 상처받고, 상처 주는 삶. 허나 그것이 주인공뿐이랴. 남편을 잃고 그의 차를 타고 다니는 어머니도, 미네소타 출신으로, 동향 사람 중 아무도 모르기에 광양을 선택한 마마 킴도, 나머지 두 김가영도 똑같다. 모두 제대로 된 정체 없이, 공물감과 함께 거한다.그런 세 인물이 소설의 주 배경이 되는 마마 킴의 카페에서 만난다. 속의 장면도, 대화도, 서로를 연결하는 방식도, 아주 절묘하며, 댄디하다.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를 위로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쿨하게 건넨다. 아마 서로의 ‘공물감’ 그대로를. 그런 ‘건넴’이 합주처럼 보이는 건 왜일까. 작가의 솜씨가 대단하다. 도구의 사용이 세련되었다. 모두 직접 읽고 그런 합주를 느껴 보면 좋겠다.종국에는 여러 인물의 ‘비어 있음’ 그 자체가 독자인 내 앞에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보랏빛 비처럼 쏟아지는 그 ‘비어 있음’은 독자인 내게 말하고 있었다. 널 아프게 하려던 게 아니라고, 서로의 ‘비어 있음’은 서로에게 고통을 주려던 게 아니라고.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독자인 나를 포함한 인물 모두가 합일되니, 주인공 ‘김가영’과 엄마, 마마 킴 셋의 존재가 노래 <Purple Rain>과 함께 제각각 독창적으로 발하는 듯했다. ‘완성’이란 말을 작가가 좋아할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무언가가 완성된, 낯선 아우라로 다가왔다.‘나’란 어떻게 발산하는가. 내뿜는가. 비어 있는 서로의 소통, 나와 너가 다르지 않다는 지각, 그러다 이따금 ‘나’가 하는 의역의 하모니가 아닐까 싶다. 작중 <Emanate> 작품처럼, 모작 끝에 ‘나’가 태어나듯이.작가만의 아이러니가 낯설다. 독창적이고, 댄디하다. 없음으로 있음을 직조해 나가는 방식이 놀라웠다. minimum
창작의 숲, 쓰고 잊고 다시 쓰는 계절  [스포일러 주의] 소설 줄거리가 포함된 리뷰입니다.독자인 제게 이 소설은 ‘창작자’의 ‘창작 기간’을 근사한 상징과 은유로 빚은 이야기로 읽혔습니다. 주인공을 이해해 보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다음의 세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① 숲속 목조 주택에서의 임시 거주, ② 글쓰기 모임 참여, ③ 난임. 셋 다 문자 그대로의 정보라기보다는 상징과 은유로 느껴졌습니다.나무들이 빼곡한 숲에, 그 나무들을 재료로 만든 집에 혼자 머무는 주인공. 이제 막 창작을 시작해야 하는 이의 처지 같습니다. 글을 쓰는 작가라면, 이미 수두룩한 작품들로 둘러싸인 현시점에서 자기만의 ‘새로움’을 써 내야 합니다. 음악가도 비슷합니다. 수많은 기존 히트곡들을 레퍼런스로 참고하되, 표절 시비에 걸리지 않을 완연한 신곡을 뽑아 내야 합니다.소설 속 주인공의 글쓰기 소재가 왜 하필 ‘나무’인가. 그녀의 임시 거처가 ‘숲속 목조 주택’이기 때문일 거라 짐작합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이 만든 ‘나무의 집’에서 나무에 관한 글을 쓴다는 설정은, 창작자가 나무-레퍼런스 속에서 자기만의 나무-독창성을 짓는다는 상징이 아닐까 싶습니다.주인공이 참여하는 글쓰기 모임에 “출간 작가”가 소속되어 있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혹은 되고 싶었으나 끝내 실패한) 롤모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또한 동시에 주인공이 자기다움-독창성을 스스로 검열하게 만드는 내면의 불안과 의심을 상징하는 캐릭터가 아닐까요. 일테면 이런 대목도 등장하지요. “출간 작가인 그녀”가 주인공의 나무 소설에 대해 평가하는 장면 말입니다.“뭐 나쁘지는 않은데 너무 순한 맛이에요. 좀 더 선명하게, 펀치라인을 살려보세요. 등장인물들도 더 유용하게 활용하시고.”이 단평을 주인공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소설 안에 굳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독자로서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출간 작가한테 저런 소리를 듣던 시점에 주인공은 이미 창작자로서 자기 창작물과 ‘대화’하고 심지어 ‘사랑’까지 하는 경지에 이르렀고, 따라서 누가 뭐라고 하든 크게 ‘마상’을 입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검토 의견을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닐 테고, 취할 것을 취하되 창작자로서의 자존감을 쉽게 잃지 않는 건강한 패기를 갖추었다랄까요. 제가 읽은 「숲」의 주인공은 그런 창작자인 것 같습니다.주인공의 난임은 「숲」 이야기가 ‘창작자의 창작 과정’으로 다가오게 된 결정적 단서였습니다. 흔히 창작의 고통은 산고에 비교되고는 합니다. 창작물을 ‘내 새끼’라 표현하는 창작자들도 더러 있고요. 오랜 난임 치료로 결국 ‘혼자’ 남게 되었다는 주인공의 사연은, 마치 지난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대표작을 갖는 데 실패한 비운의 예술가를 연상시킵니다.소설 속 등장인물들 중에서도 친구 ‘미영’은 특별합니다. 어쩌면 ‘나무 씨’보다 더. 결혼 전에 덜컥 임신을 했고, 수염 기른 남편과 살며, 혼자 사는 친구를 각별히 챙기는 인물 배경 설명과 행동 양상이 제법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좀 과한 감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주인공의 ‘베프’ 미영은 「숲」 이야기 전체를 통틀어 가장 ‘문자 그대로’인 캐릭터로 보였습니다. 상징, 은유,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아이를 기르고 남편과 살며 친구를 아끼는 존재, 그러니까 외로운 창작자에게 꼭 필요한 ‘실체적 위로와 격려’의 제공자랄까요. 아이를 가졌고, 남편과도 화목한 미영을 주인공이 부러워하거나 시샘하는 묘사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 제게는 큰 감동이었습니다.소설은 벌목의 계절이 도래하면서 절정으로 흐릅니다. 풍요로웠던 창작의 숲이 점점 허허벌판이 되어 갑니다. 그즈음 주인공의 나무 소설도 완성이 된 듯한데, 작품의 영감이 되어 준 ‘나무 씨’도 소멸합니다. 주인공 스스로 그것을 없앱니다. 땔감으로서 마지막 몫을 하는 ‘나무 씨’의 정념과도 같은 불길 속으로, 주인공은 자기 원고를 던져 태웁니다. 한 작품을 다 끝내고, 그다음 창작의 단계로 나아가는 결연한 의지처럼 읽혔습니다. 신성한 제의 같기도 했습니다.창작의 숲에서 보낸 쓰고 잊고 다시 쓰는 계절. 「숲」이 선사하는 감동과 메시지가 소설 속 적송처럼 우람하기 그지없습니다. 주인공은 또 어디를 찾아 홀로 머물게 될까. 그곳에서 만나고 또 이별하게 될 ‘○○씨’는 어떤 모습일까. 베프 미영이는 주인공에게 무슨 반찬을 해 가지고 놀러올까. 다 읽고 나니 ‘나만의 ○○씨’보다는, 언제나 곁에 있어 줄 ‘미영이’가 더 절실해집니다. 임재훈
나만의 롯.소.코. 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이야기 아는 동생이 한동안 '도파민 디톡스'를 하겠다며 설쳐대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나는 도파민이 뭔지도 잘 몰랐는데, 사람을 흥분하게 만드는 호르몬의 일종이라고 했다. 그걸 왜 '디톡스' 해야 되냐고 동생에게 물으니,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도파민에 취해 있기 때문에 행복을 잘 못 느끼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도파민을 절제함으로써 사소한 일에도 크게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상태, 즉 '도파민 디톡스 상태'가 되어야 인생이 행복해질 거라고 말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내 '도파민 디톡스'에 집착하던 아는 동생이 떠올랐다. 지금도 그 동생의 도파민 디톡스는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그 동생이 행복해보이느냐. 아주 행복해보인다. 내 생각에는 '도파민 디톡스'를 하는 행위 자체에 도파민이 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이 소설에서 도파민은 마치 사람 같다. 롯데, 소맥, 코인 파트로 나뉘어 마치 회사의 부서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다 주요 소비층인 남자가 어느 날 도파민 중단 선언을 하면서 비상 사태가 벌어지는 이야기다. 아주 흥미로운 전개다. 다 읽고 나서 내 머릿속의 롯, 소, 코 같은 파트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나를 흥분하게 하는 것들이라. 문학, 쇼핑, 게임 정도?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도파민이 과다해지면 일상 생활이 약간 뭉개지는 느낌을 받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뭐, 나는 주인공처럼 도파민 탓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아는 동생의 말처럼 우리는 너무 많은 도파민에 중독되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일상의 사소한 것에도 행복을 잘 느끼지 못하는 걸지도.   도파민을 특정 인물처럼 묘사하는 것이 특징적이고 재미있는 소설이었다. 읽어보시고 내 머릿속의 롯, 소, 코는 뭘지 한 번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박은비
아 맞다, 취재 대상은 ‘제물’이 아니라 ‘동제’였지 ​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          “살해 현장을 방불케 하는 처참한 광경과 냄새”라는 소설 초반부의 직접적 묘사는 독자로 하여금 이야기의 결말, 즉 ‘제물’의 실체를 예측해 보도록 만듭니다. 셀프 스포일러인 셈인데, 저는 이것이 작가의 의도라고 느꼈습니다.[자, 잊지 마세요. 취재 대상은 ‘제물’이 아니라 ‘동제(동신제사)’라는 걸.]작가가 이런 안내판을 세워 둔 것 같았습니다. 안내에 따라 읽어 나갔습니다.「동제」의 줄거리를 아주 간략히 요약하면 ‘군내(郡內​) 소규모 월간지 기자의 취재 후기’입니다. 주인공이 현장 취재를 나서면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기사 작성의 기본 요소는 육하원칙이지요. 그래서 주인공은 질문을 많이 합니다. 동제 준비에 한창인 마을 노인들에게 이것저것 묻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답을 못 듣는다는 거죠.— #1“우리는 제사 때 정종 안 쓰고 감주 쓴다 아입니꺼.”나는 그 이유를 물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그랬다는 막연한 대답만 돌아왔다.#2“신위를 묻는 과정이라예. 원래 동제 끝나고 쓴 신위들은 제물의 일부랑 같이 서낭나무 밑에 구덩이를 파서 묻습니더.”“그렇게 하는 이유가 따로 있습니까?”“옛날부터 그래 해왔기 때문에 그라지예. 특별한 이유는 잘 모르겠네예.”#3동제가 아직 남아 있다는 건 과연 좋은 것일까. 미지근하게 식은 감주를 마저 들이켰다.—#1과 #2는 취재원들과의 문답, #3은 주인공의 자문입니다. 제주(祭酒)로 왜 감주를 써야 하는지, 제를 마친 후 신위(神位)를 왜 성황나무 앞 구덩이에 매장하는지, 동제에 참여하는 사람들 누구도 답을 못합니다. 제주(祭主) 역할인 ‘주 씨’ 노인조차 이유를 모르고요. 하기야, 동제의 대상인 신주(神主)부터가 이미 미지의 존재입니다.이쯤 되면 이 취재는 망한 겁니다. 기자 입장에서는 당연히 #3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 하는지 아무도 이유를 모르고 단지 전통이라는 이유로 남아 있는 이 동신제사, 대체 뭐지⋯?해체된 제물의 살점이 마치 소설 속 ‘껍데기만 남은’ 허례허식 동제의 모습 같기도 합니다. 소설의 내용을 곰곰 곱씹을수록 소름이 돋는 것이, 동제 준비 과정 중 ‘이유가 명확한’ 것은 제물 해체가 유일했습니다.과연 주인공은 추가 심층 취재를 이을 것인가. 진짜로 그 마을이 행해 온 동제란 일종의 ‘하드고어 고려장’이란 말인가. 독자는 알 수 없습니다. 기자가 취재를 중단했으니까요. 다만 소설에 기록된 전지적 기자 시점의 ‘팩트’를 바탕으로 결론을 도출해 볼 따름입니다.누가 언제 어디서 왜 어떻게/무엇에게 죽음을 맞았는지도 불확실하고, 심지어는 시신도 없이 장을 치르는 마을. 거주민들의 관심사는 죽음의 대상이나 연유가 아니라, 그저 ‘제사’뿐인 것 같습니다. 제사-전통을 계속 잇기 위해 죽음을 반기는 게 아닌가 하는 섬뜩한 감상도 해 보게 됩니다.상여소리 인간문화재 추천을 받을 만큼 죽음을 큰소리로 만방에 알리던 ‘배 회장’. 그의 사라짐이 독자인 제게는 ‘죽음의 음소거’, ‘죽음의 익명화’를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기묘한 밸런스입니다. 제사를 전통으로 간직한 마을에, 정작 사람의 죽음은 소리도 이름도 없이 몰래 발생한다는 것이.「동제」 후속편을 기대해 봅니다. 제대로 각성한 주인공이 목숨 걸고 ‘빡센’ 르포르타주를 쓰는 이야기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임재훈
‘인 서울’도 ‘인 사평’도 포화 상태라니    ​(스포일러 주의: 소설 내용이 포함된 리뷰입니다.)서울 인구가 포화 상태라는 건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고, 수험생들과 부모들의 입시 스트레스를 부추기는 교육 정책 혼선 또한 자주 듣는 소식입니다. ‘인 서울’ 러시만이라도 중단되어야 인구 밀집도가 조금은 낮아질 것 같은데, 그럴 일은 왠지 없을 것 같습니다. 소설을 읽다 문득 궁금해져서 통계청 지표누리 사이트를 들어가 봤습니다. 인구 밀도가 높은 ‘시’와 낮은 ‘도’의 차이가 극단적입니다. 서울 15,533명/㎢, 부산 4,258명/㎢인 반면에 강원 91명/㎢, 경북 137명/㎢입니다.(2023년 기준, 출처 — https://bitl.to/3nJR) 참고로 서울 면적은 605㎢, 총 인구는 2022년 기준 941.1만 명으로 집계되어 있었습니다.수도 서울을 ‘터져 버리기 일보 직전’인 공간으로, 그곳에서 ‘인 서울’을 목표로 공부하는 고등학교 3학년생들을 ‘터져 버린 아이들’로 설정한 작가의 의도에 크게 공감합니다.단지 ‘터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소설은 수험생들의 육체를 풍선처럼 부풀려 말 그대로 ‘날려보내는’ 상상력을 추가합니다. 그리고 약간의 변주까지 더합니다. 주인공인 국어교사 임지환의 반 학생 ‘준영’이의 머리가 터질 듯 부풀었다가 다시 줄어드는 장면을 보여 준 것이죠.‘역시, 학생을 아끼는 선생의 존재가 아이들을 정상으로 되돌려 놓는구나.’ 하고 안심을 하였으나, 결국 준영 학생도 풍선이 되어 날아가 버립니다. 서울의 인구 포화와 ‘인 서울’ 러시는 과연 스승의 은혜 정도로 막아지는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준영 학생이 날아가는/사라지는 장면이 독자인 제게는 ‘각성 포인트’였습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따위가 아니라, 오랜 시간 연구와 정책 입안이 요구되는 사회적 문제임을 자각했다랄까요. 그리고 국어교사 임지환도 곧 풍선이 되어 날아간다는 점에서, 이 사태의 피해자가 학생들뿐만은 아니라는 작가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작가가 제시한 해법은 ‘리셋’입니다. 소설 속에서는 실제로 지구 대격변의 조짐이 그려집니다. 독자로서, 그리고 서울시 거주민으로서 ‘리셋’이라는 해법이 썩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왜 리셋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서사를 지지합니다.서울에서 머리가 터져 버릴 듯 괴로워하던 이들이 부유하여 모이는 곳이 바로 ‘사평’입니다. 소설 속에서도 잠깐 언급되지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래빗 홀’ 같은 환상의 시공간입니다. 또한 치유의 성소이기도 합니다.‘사평’마저도 이제 포화 상태라는 ‘래빗’의 하소연. 이 부분이 소설 「사평」의 절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 서울’의 낙오자들을 달래려고 조성된 곳인데, 여기도 인구 밀집도가 만만찮은 겁니다. ‘인 서울’에 진학하는 학생들 수만큼, ‘인 사평’으로 낙오되는 아이들도 많다는 사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조만간 터져 버릴 게 명약관화하다는 전망. 그러니 유일한 방법은 리셋일 수밖에 없다, 라는 이야기.미주(尾註)까지가 이 소설의 완전한 분량입니다. 본문의 이야기가 끝난 뒤 마치 에필로그처럼 덧붙여진 주석의 내용이 서늘합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제목인 ‘사평(沙平)’이 한강의 옛말일 뿐 아니라, ‘서벌’과 ‘서라벌’처럼 서울을 이르는 또 다른 본딧말 중 하나라는 설명. 즉 ‘사평’도 실은 ‘서울’이었다는.소설을 다 읽고 영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퓨리오사가 몇 날 며칠 사막을 질주하여 ‘녹색의 땅’에 도착했지만, 이름만 ‘녹색’일 뿐 그곳도 결국 모래의 일부였음을 알고 절규하는 장면 말입니다.「사평」이 웹툰으로 만들어진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도 해 보았습니다. 시각화된 ‘사평’의 이미지와, 별안간 머리와 몸이 부푸는 학생들의 모습이 무척 강렬할 것 같아서요. 혹시라도 웹툰이 나온다면 꼭 챙겨 보겠습니다. 임재훈

+